현종 때의 예송-갑인예송 2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대왕대비의 복제를 처음에는 기년으로 했다가 다시 대공(大功)으로 고친 까닭이 무엇이냐?”

기해년에 상복 제도를 기년복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기해년에는 국제를 사용하고 이번에는 옛날의 예를 썼는데 왜 앞뒤가 다른가?”

그때에 옛날과 지금의 예를 참작해 사용했고 지금 역시 그와 같이 했습니다.”

- 《현종실록22, 현종 157월 을해

옛날의 예대로라면 큰며느리 복은 대공이다. 그런데 국제(國制)의 큰며느리 복은 기년으로 되어 있다. 김수흥과 민유중 등 서인은 기해예송 때 고례에 따라 중자복(衆子服)을 입었기 때문에 지금 중자의 처에 대한 복, 즉 대공으로 고쳤다고 우겼다. 분명 기해년에는 국제에만 의거해 정했고 그에 따른다면 대왕대비는 당연히 며느리를 위해 기년을 입어야 한다. 서인들이 이제 와서 장자와 중자를 구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해예송 때 표면적으로는 국제나 고례가 모두 기년이었기 때문에 국제를 따랐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왕은 이 논의를 위해 김수항, 김수흥, 민유중, 김만기, 홍처량 등 시임원임 대신 및 육경삼사의 장관 등을 모두 불러 의논하게 했다. 그러나 몇 차례에 걸친 논의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라는 것이 기해 복제가 어떠한 논의 과정을 거쳐 결정된 것인가 하는 경위 보고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대공복이 옳다고 생각했다.

서인 대부분이 기해년에 장자니, 중자니 하고 거론하지 않았던 것은 상복 제도가 똑같이 기년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에 며느리는 장자의 처인지 중자의 처인지를 구분하므로 대통을 계승하더라도 인륜의 순서로 말한다면 장자와 중자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서인들은 그때 3년복을 행하지 않고 기년복으로 한 것은 중자 때 입는 옛날의 제도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인식을 뿌리 깊게 가지고 있었다. 서인들은 시종일관 효종을 인조의 중자로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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