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때의 예송-갑인예송 1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지금 국가의 제도에 따라 정한다 하더라도 뒷날 반드시 또 다른 논란이 있을 것이다.

- 《연려실기술31, <현종 조 고사본말> 기해자의 대비복제

 

기해예송 당시 국제기년복 논의를 이끌어 갔던 정태화의 예언 아닌 예언이었다. 그 또 다른 논란은 효종이 죽은 지 15년 만인 1674(현종 15) 223일에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유의 딸)가 승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차 예송 발단의 주인공 대왕대비 조씨의 상복이 또다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대왕대비에게 있어 인선왕후는 과연 장자부(長子婦)인가, 중자부(衆子婦)인가? 이 문제의 해결을 보기 위해서는 또 불가피하게 효종이 장자인지 중자인지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1차 예송 때의 결정은 이제 더 이상 최선책이 될 수 없었다.

 

분명 기해년에 국제(國制)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했는데…….’

227일 예조에서는 처음 대왕대비의 복을 기년복으로 했는데 효종비의 복제를 효종과 같이할 수 없다고 해 다시 대공복(大功服, 9개월 복)으로 바꾸어 정했다. 그러나 대공으로 성복한 지 5개월 뒤인 76, 경상도 대구 유생 도신징이 대공복의 부당성을 들고 나오면서 예송 논쟁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도신징은 기해년 효종상에 경국대전에 의해 장자복으로써 기년복을 입었으면, 갑인년 인선왕후 상에도 장부복(長婦服)으로써 큰며느리를 위해 기년복을 입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경국대전오복조(五服條)에는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서는 장중자 구별 없이 기년복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위해서 장자 처의 경우는 기년복을, 중자 처의 경우는 대공복을 입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며느리는 아들의 위상에 따라 그 지위가 정해지는 법, 그런데도 경국대전이 아들을 위해서는 장중을 구별하지 않으면서 며느리를 위해서는 장중을 구별해 놓은 것은 자체 내의 모순점이자 논쟁의 불씨였다.

현종은 병풍에 영남 유생 도신징이라고 써 놓을 정도로 이 소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왕은 영의정 김수흥에게 대왕대비 복제를 기년에서 대공으로 바꾼 이유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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