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때의 예송 - 영남 예소(嶺南禮疏) 1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기해예송이 기년복으로 귀결되자 남인의 3년설과의 논란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1666(현종 7)으로 접어들면서 예송은 새로운 국면으로 진전되었다. 유세철을 소두로 1천여 명의 영남 남인들이 연명한 영남 유소와 이조정랑 김수홍의 예설이 다시금 정계에 큰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김수홍은 김상용의 손자로서 당시 송시열 당의 영수 격인 김수흥, 김수항 형제와 재종간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송시열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송시열의 예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송시열의 후퇴를 종용하고 나섰다. 이것은 결국 서인 예설의 약점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며 나아가 서인 측의 분열을 뜻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영남 남인들은 소를 가지고 상경하는 도중에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영남 유소는 안동의 유세철을 소두로 해 1천여 명의 도내 유생들이 연명, 그중에서 차출된 1백여 명이 상경해 올린 상소였다. 이 당시 이미 경상도 일대는 반송(反宋) 기운이 팽배해져 있었고, 또 예론에 관해서도 허목, 윤휴, 윤선도의 예론이 옳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이 예소(禮疏)에서는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의거한 그들의 해박한 고례 지식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또 역대 어느 유소보다도 내용면에서 방대했다. 그들은 상복고증(喪服考證)까지 동원해 송시열 등의 예설을 비교, 논박했고 그들의 오례(誤禮)에 대한 처벌을 주청했다.

그러나 그 예소가 겉으로는 오례에 대한 비판을 위한 것이었지만 보다 궁극적인 목표는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론을 빌미로 상대 당을 정계에서 몰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인의 집권 태세가 점차 공고화되고 있던 그때, 영남 유소에 대한 서인 측의 반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영남 유림들을 간사한 적당으로 몰아세운 반() 영남 유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이렇듯 송시열 지지파와 윤휴와 허목 지지파의 의론이 분분한 가운데 왕은 하는 수 없이 예론 시비에 결말을 짓지 못하고 그저 금지령만 내렸다. 현종은 예송에 관한 유생들의 반대지지 상소가 있을 시에는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는 벌을 내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한동안 잠잠한 듯했다. 그러나 1674(현종 15), 예론 문제는 인선왕후(효종 왕비 장씨)의 상에 대한 복제 문제로 또다시 제기되었고, 그로 인해 서인과 남인의 운명은 뒤바뀌게 되었다. 영남 유소는 결국 현종 말 서인의 실각과 남인의 집권에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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