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대내외적으로 혼란했던 시대에 이성계(李成桂)는 새로운 왕조를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정확하고 과감하게 정치적 판단을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유연한 성품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는 전장에 나가 패배를 모르는 훌륭한 무장이었다. 타고난 체격과 갈고닦은 무예,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략과 전술이 이성계를 왕으로 만든 바탕이 되었다.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복위 4) 화령부(현 영흥)에서 아버지 이자춘(李子春)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다. 왕이 된 후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전주의 향리였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동북면(東北面)의 덕원(德源)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안사는 고려인과 여진족이 섞여 살던 이 지역에 원나라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자 원의 지방관이 되었다. 이후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이춘(李春)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원의 천호(千戶) 등을 역임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도 쌍성총관부의 천호였는데, 이자춘은 당시 주변 정세 변화를 잘 읽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명나라가 새로 일어섰고 원의 세력은 약해지고 있었으며, 고려 공민왕은 그 틈을 타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고려의 영토를 회복하려 했다. 이자춘은 고려를 돕기로 하고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내응해 고려가 옛 영토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이자춘은 고려로부터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에 임명되어 동북면을 안정시키며 일대에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장대한 기골과 총명함을 자랑하던 이성계는 무예, 특히 궁술이 뛰어난 무장으로 성장했다. 힘이 좋아 남보다 갑절은 무거운 활과 화살을 쓰면서도 빗나감이 없어 명궁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훌륭한 조력자가 되었으며, 이자춘이 병마사가 된 지 4년 만인 1360년(공민왕 9) 병으로 죽자 뒤를 이어 동북면의 세력가로 떠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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