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의 딜레마-서자(庶子)란 첩자인가 중자인가? 3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이 상소가 올려지자 정가는 발칵 뒤집혔다. 이제 인조반정 이후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어 오던, 서인 주도의 남인 참여 체제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윤선도의 상소는 그 인신공격적 성격 때문에 당시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던 3년설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나아가 윤휴나 허목의 복제설마저 순수 예론이 아닌 공격성을 띤 당론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게 했다.

김수항, 이은상, 조윤석, 박세성 등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공격받은 서인 관료들은 윤선도를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상하를 이간질한다, 마음 씀씀이가 음흉하다.”라는 말로 비판하면서 중한 법으로 다스리자고 했다. 현종 역시도 윤선도의 상소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러나 현종은 윤선도가 효종의 사부였다는 점을 고려해 삼수에 유배하는 정도에서 그치게 했다. 그러나 그를 극형에 처하자는 논의는 끊이지 않았고 윤선도를 변호하고 기년설의 오류를 논변한 사람들까지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1차 예송은 결국 경국대전대명률을 근거로 한 국제기년복(國制朞年服)으로 귀결되었다. 국제기년복은 내용상의 애매한 성격, 즉 장자와 중자를 구분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논란을 피할 수 있는 임기응변책이 될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서인의 승리였다. 그러나 남인의 반발은 해를 넘겨도 그칠 줄을 몰랐다. 조경, 홍우원, 김수홍, 조수익 등이 윤선도를 지지했지만 번번이 서인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허목, 윤휴, 윤선도, 조경, 홍우원, 조수익, 홍여하, 오정창 등 명망 있는 남인들과 권시, 김수홍 등 3년설에 동조한 일부 서인들은 현종 대 내내 벼슬에 나오지도 못하고 발이 묶여 버렸다.

비단 중앙 정가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지방 유생들, 특히 영남 유생 유세철(柳世哲) 1천여 명의 복제 상소에서도 3년설의 타당함이 강조되었고 송시열은 비난받고 있었다.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송시열은 기년복이 국제를 따른 것인데 왜 자기만 공격하는지 모르겠다고 겉으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인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송시열의 기년설이 이긴 것으로 간주했다.

장중자를 구별하지 않고 입는 기년복과 중자로서 입는 기년복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기해예송에서는 더 이상의 격렬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임시방편 격으로 국제를 따랐다. 그러나 그것은 장중자의 구별을 명확히 해두지 않은 절충적 결정이었기에 또 다른 화를 낳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15년 후에 있을 또 한 차례의 예송 논쟁을 예측하고 있었다.

 


덧글

  • 零丁洋 2012/11/20 15:37 # 답글

    이런 논의가 불필요해 보이지만 사회 각 구성 단위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필요한데 요즘 사회에서 너무 개인의 일로 치부하여 금기시하다 본니 상속으로 인한 가정 내 혈육 간 반목과 갈등이 전혀 조정되고 해결할 방법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요즘 삼성가 반복을 보면 당사자도 아닌 사장단이 참여하는 것도 우습고 제사는 장자 일신에 내린다고 들었는데 장자없이 지차가 마음대로 지내는 것도 어안이 벙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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