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송준길은 허목뿐 아니라 윤휴의 설까지도 아울러 공격했다. 주로 논의의 목표는 ‘서자’라는 용어에 있었다. 즉 허목이 서자를 첩자라 본 반면 송준길과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은 이를 적장자 외의 중자를 뜻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 송시열은 기년복이 《대명률》과 국제(國制, 《경국대전》)의 규정일 뿐 아니라 고례에 의하더라도 타당한 것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허목과 양송은 다시 여러 경전을 참고하고 그 전거를 바탕으로 서로의 주장을 비판하고 나섰다. 양송 등의 예설은 논리적이고 치밀하기는 했다. 그러나 종통과 복제를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서인일지라도 이 견해에 고개를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인들로부터도 많은 비판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당시에는 사림의 공론에 거슬릴까 봐 변론에 나서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왕을 비롯한 신료들 중에서는 허목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듯 예학 경향의 차이에 따른 순수 학설 논쟁으로 전개되었던 복제예송은 윤선도의 상소가 올라온 뒤부터는 완전히 정치판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윤선도는 대체로 허목의 논의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서인의 예론에 대한 학문적 비판도 비판이지만 송시열과 송준길에 대한 노골적인 인신공격성 발언이 큰 파란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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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선왕조 시절부터 믿고 소중히 여겨 모든 것을 맡겼던 자로 두 송(宋)만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른바 중자설을 주장해 효종의 적장자 지위를 부정함으로써 정통성을 위태롭게 합니다. 이미 저뿐만이 아니라 조야의 공론도 그들을 현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망령스럽고 인후하지 못하며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자기 자신들의 안부 존영만 생각하고 임금의 안부 존영은 이렇듯 나 몰라라 하고 있습니다.
- 《현종실록》 권2, 현종 1년 4월 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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