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울릉도,독도관리 3 └ 성고선생 칼럼

안용복은 67일 육로로 가마를 타고 나가사기로 향했다. 그리고 630일 나가사기를 떠나 93일에 쓰시마번에 도착했다. 쓰시마번에서는 안용복 일행을 핍박했다. 서계도 빼았고, 일본령인 울릉도를 침범한 죄를 물었다. 쓰시마번은 15세기 초부터 울릉도 영유를 도모해 왔다. , 1407(태종 7) 소우 사다시게(宗貞茂)는 사람을 보내 대마도인을 울릉도에 이민시키겠다고 청했다. 울릉도를 넘본 것이다. 울릉도가 조선령임을 알면서도 공도(空島)임을 기화로 영유권을 차지하려 한 것이다. 이에 7월과 9월에 동래부사는 울릉도는 조선령이니 이 섬을 왕래하는 배는 해적선으로 간주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쓰시마 도주는 오사가(大板)의 역(),(1614-1615)때문에 막부에 보고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막부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오오야(大谷) · 무라가와(村川) 양가에게 다께시마 도해면허를 내주었던 것이다.

쓰시마번은 1693(숙종 19) 10월에 차왜(差倭) 귤진중을 조선에 보냈다. 그는 안용복을 데리고 가서 예조참판에게 조선인의 울릉도 출어를 금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울릉도 영유권 문제를 들고 나왔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울릉도에 관심이 없었지만 일본은 80년 동안 울릉도를 지배해 왔으니 울릉도는 일본 땅이라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일본 측의 요구에 동의하면서 연해민의 생업이니 전면적으로 금지할 수 없다는 미적지근한 답을 했다. 300년 동안 버려둔 땅을 가지고 이웃과 실호(失好)를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일본과 평화를 유지하려면 그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막부도 울릉도 영유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1696(숙종 22) 1월 노중 아베분고노가미(阿部豊後守)가 쓰시마번 가노(家老) 히라다 나오에몬(平全直右衛門)을 불러 쓸데없는 작은 섬(울릉도) 때문에 이웃나라와 우호를 잃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고 설득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 · 일 화해를 위해서였다. 접위관(接慰官) 홍중하(洪仲夏)는 죽도(울릉도)가 조선의 지계(地界)라는 것은 인정하고 일본의 어로는 인정한다는 어중간한 서계를 보냈다. 명의는 조선에, 사용권은 일본에 넘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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