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 출신 성분의 한계를 극복한 신라의 명장 2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서현이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熒惑, 화성(火星))과 진성(鎭星, 토성(土星))의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만명(萬明)도 신축일(辛丑日) 밤에 동자(童子)가 금갑(金甲)을 입고 구름을 타고 당중(堂中)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 후에 임신해 20개월 만에 유신(庾信)을 낳았다. 이때가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乙卯)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41, <열전> 권 1, 김유신

김서현과 만명부인은 경진일(庚辰日)에 꿈을 꾸고 얻은 아이라는 뜻으로, 경진(庚辰)과 한자의 모양과 발음이 비슷한 유신(庾信)이라 이름 지었다.

한편 만명부인과 김서현의 결혼을 반대했던 만호태후는 외손자인 유신을 한 번 보고 유달리 영특한 아이의 모습에 반해 김서현을 사위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로써 김서현은 미약하나마 중앙 정계에 진출해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당시에 가야 출신이라는 점은 김서현과 김유신 부자에게 여전히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럼에도 김유신은 가야계라는 열등감보다는 신라 왕족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에 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김유신은 어린 시절부터 심신을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해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이때부터 김유신은 남다른 기개로 삼국통일을 꿈꾸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김유신은 무인으로서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우면서 스스로 입지를 다져갔다. 특히 그의 나이 34세가 되던 629년(진평왕 51)에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낭비성을 함락하는 전공을 세워 크게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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