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丁若銓)은 정재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성격 또한 활달했다. 소년 시절에 서울에서 이승훈, 김원성 등과 사귀면서 이익의 학문에 깊이 심취했고 이어 권철신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에 힘썼다. 또한 이벽, 이승훈 등 남인 인사들과 매우 친밀하게 지냈으며 이들을 통해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을 비롯해 천주교 교리까지 듣고 이를 믿게 되었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16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복성재(復性齋)를 짓고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 틈틈이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관계의 명저로 꼽히고 있다.
정약용은 열여섯 살 때 서울에서 이가환과 이승훈에게서 이익의 학문에 접했고 스무세 살 때에는 마재와 서울을 잇는 두미협 뱃길에서 이벽을 만나 서학 관계 서적을 접했다. 1791년 진산 사건이 터지고 1795년 주문모가 변복해 잠입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정조는 정약용을 누구보다도 아꼈던 터라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켜 그를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자 그에게 검은 먹구름이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1801년 2월 8일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의 신문을 청해 모두 투옥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약용의 형 정약전, 정약종, 이기양, 권철신, 오석충, 홍낙민, 김건순, 김백순 등도 줄줄이 투옥되었다. 그런데 당시 압수된 문서 다발에는 정약용이 천주교를 믿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었다. 정약용은 법정에서 “신하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동생은 형을 증거할 수 없다.”라고 해 신문에 대한 명답변으로 그 뒤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되었다.
얼마 후 정약용은 형틀을 벗고 보석으로 풀려났는데, 당시 이 사건을 맡았던 이병모가 말하기를 “행동이 장차 명백해 석방하니 밥을 많이 자시고 몸을 아끼시오.”라고 했고, 심환지는 말하기를 “쯧쯧, 혼우(婚友)를 믿을 수 없네.”라고 했으며 지의금부사 이서구와 승지 김관주도 모두 너그럽게 용서해 주자는 의견이었다.
- 2012/08/1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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