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의 천주교 정책 3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앞서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일반 국민들이 천주교도들을 외세의 앞잡이로 오해하고 있었던데다가, 이런 사태가 겹치면서 대원군은 생각을 바꿔 천주교도를 박해하는 쪽으로 방침을 굳혔다. 서양 신부도 서양 오랑캐와 한통속이고, 조선의 천주교도들은 그들의 앞잡이라고 보았다. 이로부터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졌다.

1866년 1월 5일, 베르뇌 주교의 하인 이선이와 전장운, 최형 등이 체포되었다. 무시무시한 고문이 가해졌다. 이어 베르뇌 주교, 다블뤼 주교 등 프랑스 신부 아홉 명과 홍봉주, 남종삼은 물론, 정의배, 전장운, 최형 등의 주요 신자들과 수천 명의 교인들이 서울과 전국에서 체포되었다. 이들 모두 서울의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 등지에서 순교했다. 박해 현장은 참으로 목불인견이었다.

이때 전국을 일제히 수색하니 포승에 묶여 끌려가는 모습이 길가에서 보이는 정도였고, 포도청 감옥이 만원이 되어 재결할 수도 없었다. 그중에는 아낙네, 어린아이들과 같은 철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포장이 민망해 배교(背敎)할 것을 타일러도 신자(信者)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때 매로 때려서 기어코 회개시키고자 하니 피부가 낭자하게 터지고 피가 청(廳)에까지 튀어 올랐다. ……죽일 때마다 교를 배반하겠는가고 물으면 어린아이들도 그 부모를 따라서 천당에 오르기를 원했다. 대원군이 듣고서 다 죽이라고 명하고 어린아이들만은 살려 주라고 했다. 시체를 수구문 밖에 산더미처럼 쌓아 버리니 백성들이 벌벌 떨면서 더욱더 위령(威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 《근세조선정감》

혹독하기 이를 데 없고, 너무도 많은 희생자를 낸 병인사옥(1866~1872)의 참상이 바로 이것이다. 병인사옥은 신유사옥, 기해사옥과 더불어 3대 사옥이라 하는 바, 그중에서도 병인사옥이 가장 심했다. 그런데 대원군을 자극해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가중시킨 사건이 있었는데,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두 차례의 양요였다.


덧글

  • 零丁洋 2012/08/05 14:05 # 답글

    열강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천주교도를 조선을 노리는 열강의 앞잡이로 인식한 것인가요? 또한 종교가 제국주의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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