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비는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 즉 익종(翼宗)의 비다. 일찍이 남편을 잃은 그녀는 왕실 내에서는 가장 웃어른이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 가문은 순조 대에 이어 철종 대에도 외척으로서 세도를 부려 조대비는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조대비는 안동 김씨 가문에 대해 한이 많았다. 그 점에서 흥선군과 동병상련이었다.
왕실의 관례상 전대 왕이 후사 없이 사망할 경우 후계자 지명권은 왕실의 최고 어른에게 있었다. 조선 천하의 새 주인을 지명하는 어마어마한 권한이 조대비에게 주어진 것이다. 조대비는 그때를 기다렸다. 흥선군 역시 그러했다.
마침내 그 기회가 왔다. 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죽은 것이다. 과연 조대비와 흥선군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안동 김씨 세도가들이 왕실의 인물을 다 제거했다고 여기고 방심한 탓도 있었다. 조대비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천하의 새 주인으로 지명했다. 먼저 명복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잇게 하고, 그를 익성군(翼成君)에 봉한 뒤 관례를 치르고 국왕에 즉위하게 했다. 조대비와 흥선군의 합작이 완성되는 순간이었고, 장안의 파락호 흥선군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로 뛰어오르는 분기점이었다. 파란만장한 고종의 시대는 이렇게 대원군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고종 즉위 이후 10년간 정권을 틀어쥔 것은 대원군이었다. 조대비의 수렴청정이 3년간 지속되었지만, 이미 실권은 대원군에게 있었다. 삶의 바닥까지 갔다가 솟구치듯 떠오른 대원군은 의욕이 넘쳤다. 그의 시정 방향은 폐정을 발본색원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국가와 왕실의 기틀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기 이전 조선의 왕권은 한껏 추락해 있었다. 서학이 전래되어 유교 사회의 전통이 동요하는 가운데, 세도정치로 인해 왕도 정치의 실현은 요원한 채 정국의 파행이 계속되었다. 국법 질서가 문란해지자 기승을 부린 것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 등 삼정의 문란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세무 행정, 병무 행정, 금융기관에 두루 부정이 만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간 관리는 배가 불렀지만, 국고는 텅 비고 백성은 백성대로 생활고에 허덕였다.
- 2012/08/03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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