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의 천주교 정책 1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대원군의 내치(內治)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했다. 호포제 실시가 그랬고, 서원 철폐가 또한 그랬다. 사민평등을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바닥에 이른 나라의 재정과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감안할 때 그것은 놀랍고도 혁신적인 조치였다. 경복궁 중건도 백성들이 고된 노역과 재정적 부담을 감수해야 했던 점은 안쓰럽지만, 나라의 정궁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근 250여 년 동안이나 방치되었던 사정을 감안할 때 수긍할 만한 일이다. 훗날 그의 내정에 대한 역사가의 평은 비교적 후했다.

그러나 대외 정책 쪽은 달랐다. 백암 박은식은 이렇게 평했다.

대원군의 용기와 결단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해외 사정에 대한 무지와 그릇된 세계정세 판단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거스르며 나라의 정책 방향을 이끌어 간 것은 더할 수 없는 실책이다. 참으로 애석하다.

- 《한국통사》

이러한 비판을 몰고 온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다름 아닌 쇄국정책이었다. 그 맥락에서 벌어진 참상이 천주교도 박해(병인박해)였고, 이를 가중시킨 계기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였다. 그리고 이 모두를 상징하는 유물은 척화비였다.

천주교도 박해로 대원군의 악명은 서양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원군은 천주교도들을 서양 오랑캐의 앞잡이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원군의 내치(內治)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했다. 호포제 실시가 그랬고, 서원 철폐가 또한 그랬다. 사민평등을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바닥에 이른 나라의 재정과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감안할 때 그것은 놀랍고도 혁신적인 조치였다. 경복궁 중건도 백성들이 고된 노역과 재정적 부담을 감수해야 했던 점은 안쓰럽지만, 나라의 정궁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근 250여 년 동안이나 방치되었던 사정을 감안할 때 수긍할 만한 일이다. 훗날 그의 내정에 대한 역사가의 평은 비교적 후했다.

그러나 대외 정책 쪽은 달랐다. 백암 박은식은 이렇게 평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