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의 파락호 흥선군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아버지인 흥선군과 익종비인 조대비의 협력으로 가능했다. 흥선군 이하응의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다. 그는 영조의 증손인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다. 세간에서는 출세한 이후의 그를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렀고, 오늘날에는 흥선대원군이라 한다. 한창 때 ‘대원위대감의 분부’라 하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했고, 그의 호령 한마디에 ‘조선 팔도의 산천초목이 떤다’고 했다.

그러나 왕손으로 있을 때의 이하응은 그렇지 않았다. 왕손이지만, 영락한 왕손이었다.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사고무친인데다가 지속된 세도정치 아래 운신 폭이 좁았다. 스물한 살 때인 1841년(헌종 7) 흥선정이 되었고, 2년 뒤 흥선군에 봉해졌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후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 한직을 전전했다. 이렇게 왕손치고는 관직 경력도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정도라면 그래도 보아줄 만했다.

언제부터인가 흥선군은 장안을 떠도는 ‘파락호’로 전락해 있었다. 그가 타락한 원인은 외척 세도에 있었다. 철종 당시는 외척인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장악해 왕실과 종친을 위협했다. 종친의 촉망을 받던 돈령부도정 이하전이 역모의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1862), 경평군이 세도 재상 김좌근을 비난했다고 해 작호(爵號)가 박탈되어 귀양을 갔다. 흥선군이 시정의 무뢰한 ‘천하장안(千河張安)’ 등과 어울려 파락호 행각을 벌인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왕실에서야 망신살이 뻗쳤지만 이는 기발한 호신책이었다.

흥선군에게는 또 다른 재주가 있었다. 난초를 치는 솜씨가 빼어났는데 그 난화를 그의 호를 따 석파란(石坡蘭)이라 불렀다. 석파란은 운미(芸楣, 민영익)의 난과 함께 그 시대 난화의 쌍벽을 이루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면박당하고 퇴짜 맞기 일쑤였지만 흥선군은 자신이 친 난초를 들고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마다하지 않았다. 바로 그 시절 흥선군은 민정을 시찰하는 한편, 궁중의 조대비(趙大妃)와 줄을 대어 장래를 대비했다. 난세의 정략가는 이미 파락호 시절부터 세상 돌아가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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