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 조씨의 내력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풍양 조씨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명문이다. 19세기 초부터 안동 김씨가 서울 장동(壯洞), 전동(典洞), 교동(校洞)에 주로 살면서 세도를 부린 데 반해 풍양 조씨는 전동(洞)에서 세도를 부렸다. 그런데 풍양 조씨 중에서도 세도를 부린 계통은 조선 초기에 회양부사를 지낸 조신의 후손들이다. 18세기에 들어와 조문명, 조현명 형제는 소론으로 영조의 탕평 정책을 추진하는 데 적극 참여하기도 했으나 영조 말년에 정치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이들의 후손은 18세기 말부터는 더 이상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풍양 조씨 세도 집안의 직계 조상을 더듬어 올라가면 조상경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영조 연간 10여 년 동안 이조판서의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영조 연간의 인사는 주로 그가 주도했다. 조상경의 아들인 조엄은 평안감사로 재직하면서 뇌물을 착복했다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자 조엄의 아들 조진관은 세간의 비난에 대해 원통함을 호소하며 신원 운동을 전개했다. 조엄의 뇌물 착복 문제는 당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켜 비변사에서 이 문제를 현직전직 대신들에게 논의하게 했다. 결국 정조가 조엄은 뇌물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무죄를 인정해 주었다.

19세기 초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득영의 정치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06년(순조 6)은 그가 형조참판으로 재직할 때였다. 그는 정순왕후 세력인 우의정 김달순이 경연 석상에서 한 말을 문제 삼아 탄핵함으로써 이조참판에 승진하고 다시 병조판서에 특별 임명되었다. 그는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한 벽파 세력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장차 안동 김씨 시파 세력들이 정치 일선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장차 풍양 조씨가 세도를 부릴 수 있게 된 것은 이처럼 조득영이 우선 안동 김씨와 정치적으로 공조 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