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과 신정왕후, 그리고 나합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한 번은 신정왕후가 나합을 불러 죄를 크게 셋으로 나누어 나무란 적이 있었다. 첫 번째 죄는 시골의 천한 기생으로서 대신의 총애를 믿고 정치에 간여해 뇌물을 받아 치부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죄는 투기가 심해 김좌근이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자 그의 뺨을 때린 것으로 대신에게 무례하게 군 것이고, 세 번째 죄는 세상에서 나합이라 하니 합이라는 것은 정승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호칭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닷새 만에 행장을 꾸려서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을 내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김좌근과 나합이 서로 붙들고 울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김좌근은 병을 칭탁하고 청수동 별장에서 손을 사절하고 밤낮으로 시름하며 지냈다. 이러한 상황에 대원군 이하응이 끼어들었다. 나합을 계속 김좌근의 곁에 있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고종의 결혼 비용으로 10만 냥을 뜯어내고 경복궁 건축비로 역시 10만 냥을 받아 낸 것이다.

당시 백성은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해 가는 지경이었고 전국은 민란으로 혼란스러웠는데도 김병기 집의 개는 약밥을 먹었다고 한다. 또한 대신의 첩이라고 하지만 일개 미천한 나주 기생의 치마폭에서 20만 냥이 나오는 세상이었으니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당시에도 안동 김씨 세력이 워낙 막강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정권만 내준 셈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김좌근, 김병기, 김병국, 김병학 등은 정권의 핵심에서 얼씬거렸다. 오직 김흥근만이 그들과 달라 이미 헌종 때에 시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간쟁하다가 유배되기도 했고 석방되어서는 양화도 별장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조판서로 일곱 번을 불러도 그가 나오지 않자 당시에 그는 매우 고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얼마 후 벼슬길에 나와 다시는 사직하지 않고 정승에 여러 번 임용되었으나 국가를 위해 의견을 내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김흥근은 철종이 아들이 없어 일찍이 고종에게 왕위를 넘기려는 의사를 보이자 “흥선군이 살아 있으니 임금이 두 사람이 된다. 그만둘 수 없다면 바로 흥선군이 임금이 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1864년 대원군이 점점 정권을 잡게 되자 김흥근은 조정에서 큰소리로 대원군은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대원군은 여러 김씨 중에서 김흥근을 제일 미워해 그의 토지를 빼앗고 서울 북문 밖 삼계동에 있던 당시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별장도 빼앗아 버렸다.

그런데 김병학은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흥선군에게 그 딸을 왕비에 간택해 줄 것을 약속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대원군이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고종을 민치록의 딸에게 장가보냄으로써 김병학의 딸은 뒤에 조신희에게 시집갔다. 이처럼 안동 김씨는 끝까지 정권을 놓지 않기 위해 줄 타기를 계속했다. 이것은 대원군 정권이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증거이다. 대원군은 역시 자신이 10년 세도를 부리는 입장이 되어 김씨의 전철을 밟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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