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충돌로 표현되는 사화, 그것은 분명 연산조 최대의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사림파는 세조와 성종의 온실 속에서 한동안 기세 좋게 성장을 거듭했다. 이들에게는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해 성리학 정통을 체득했다는 학문적인 자부심도 있었고, 절의파의 후계자라는 점에서 유학자로서의 명분도 당당했다.

일찍이 세종은 선비들의 학문적인 자질을 인정해 등용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김숙자, 이보흠, 이맹전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비록 소규모이기는 했지만 고사리와 미나리로 상징되는 불사이군의 세대는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로 사림파의 진출은 한동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왕위를 찬탈한 불의의 군왕을 섬길 수는 없었다. 그것은 명분이요, 소신이었다. 바로 여기에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었다. 세조는 한명회와 권람 등의 협찬 속에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쟁취했다. 그런 다음 성종 대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무려 250여 명이 공신에 책봉되었다. 훈구파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인심이 세조에게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세조의 집권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집단이 있었는데 집현전 출신의 학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에 세조는 철혈의 군주답게 집현전을 혁파한 다음 사림파로 그 자리를 메우려 했다. 김종직은 바로 이 시기를 전후해 진출한 사림파의 거장이었다. 세조는 훈구파와 사림파를 동시에 키우고 있었다. 양자 대결로 귀결되는 사화는 이미 세조에 의해 그 싹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사림파는 예종을 거쳐 성종 조에 이르러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성종의 우문 정치는 사림파가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토양이었다. 여기에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했던 성종의 또 다른 목적은 사림의 진출을 더욱 촉진시켰다. 이들은 주로 언론과 삼사에 진출해 조정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했다. 직책은 높지 않았지만 정치의 득실을 논할 수 있는 이 자리는 분명 사림파의 집결처이며 권력 기반이었다. 권오복, 김일손, 이원, 표연말, 유호인, 이종준, 이주, 손중돈, 유순정, 강경서 등은 사림파를 대표하는 쟁쟁한 인사들로서 대부분 김종직의 문인들이었다.

이런 실정에서 사림파를 시골 선비로 치부하는 것은 시대적인 착오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학문적인 자질과 발언권을 겸비한 무시할 수 없는 신진 세력이었다. 훈구파는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만 했다. 이제 양자의 갈등과 대립은 불가피했다.

사림파는 훈구파를 두고 ‘탐욕스럽고 무능한 소인배’라 하고, 훈구파는 사림파에게 ‘도도하게 구는 경박한 야심배’라는 험담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견제와 공격의 풍조가 만연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연산군이 즉위했으니 보수와 진보의 충돌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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