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전 민씨와 희빈 장씨 1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경신환국 후 남인과 서인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인들은 임술고변(1682)을 거치면서 훈척에 대한 태도 여하에 따라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기하는 가운데 회니시비(懷尼是非)로 인해 반목의 골이 깊어 갔다.

1684년(숙종 10) 9월 ‘정권 제조기’ 김석주의 죽음으로 훈척의 기세는 위축되었지만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숙종 12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궁중 비사’가 당쟁의 새로운 주제로 대두하게 되었다. 숙종의 첫째 부인이었던 인경왕후(김만기의 딸)는 자식을 낳지 못한 채 1680년(숙종 6)에 사망했다. 그런데 계비로 들인 인현왕후(민유중의 딸)도 수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궁녀 장씨가 숙종의 은총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장씨는 인평대군의 아들 복창군과 복선군의 심복이던 역관(譯官) 장현의 종질녀로서 인경왕후 사망 이후 나인으로 선발되어 궁중에 들어온 여자였다. 여느 나인과 마찬가지로 남색 치마에 옥색 회장저고리를 걸쳤지만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다. 빼어난 용모로 숙종을 매료시켜 사랑을 독차지했다. ‘성은(聖恩)’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숙종과 장씨의 관계를 눈치챈 대비 명성왕후가 장씨에게 추방령을 내림으로써 생이별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장씨는 숭선군의 아내이며 동평군의 어머니인 신씨의 보살핌을 받았다.

중전 민씨는 그 일을 듣고 조용히 명성왕후에게 아뢰었다.

임금의 은총을 입은 궁인이 오랫동안 민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체가 지극히 미안하니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 《단암만록》

그러나 명성왕후는 이렇게 대답하며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내전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해, 주상이 만약 꾐에 빠지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

- 《단암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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