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14세 어린 군주에서 독단의 군주로 2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숙종은 환국이라는 방법으로 정권을 교체함으로써 손상되었던 왕권의 회복과 강화에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당파 간의 대립을 이용해 때로는 남인의 손을, 또 때로는 노론과 소론의 손을 번갈아 들어주면서 조정 내의 세력 균형을 꾀했다.

그러한 가운데 숙종은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 온 사회체제 전반의 복구 정비 작업이 거의 종료되면서 상당한 치적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과 양역 변통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나타나듯이 민생 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 민폐의 제거와 민생 안정책의 시행에 주력했다.

남인으로의 집권당 교체의 서막은 갑인예송 후 영의정에 허적이 임명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갓 즉위한 열네 살의 숙종, 김석주와 김우명 등의 외척 세력, 그리고 정국의 변화를 꾀하고 있던 남인은 서인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 명분상 예론을 계속 이용했다. 예론을 그르친 주모자, 서인의 실세인 송시열을 처벌하는 것만이 서인 세력을 제거하는 지름길이었다.

숙종이 즉위하던 그해 9월, 왕이 송시열에게 현종의 묘비문을 짓도록 위촉하면서 사단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 나온 것이 진주 유생 곽세건의 상소였다.

판부사 송시열에게 선왕의 묘지문을 짓게 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하물며 사론(邪論)을 좇은 김수흥도 귀양을 갔는데, 사론을 주창한 시열만이 형벌에서 빠졌습니다. 시열은 효종의 죄인이요, 선왕의 죄인인데 어찌 양조의 죄인에게 함부로 붓을 잡게 하겠습니까?

- 《숙종실록》 권1, 숙종 즉위년 9월 병술

양사에 포진해 있던 서인들은 일제히 그를 흉도로 몰아 국문해 멀리 귀양보낼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숙종은 허적의 말에 따라 과거를 보지 못하게[停擧] 하는 가벼운 처벌을 내릴 뿐이었다. 결국 현종의 묘비문은 김석주가 짓게 되었다.


덧글

  • 聖冬者 2012/05/31 09:03 # 답글

    사실 보면 숙종때가 태평성대중 하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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