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은 조선 정치사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기호계가 정권을 되찾아 이후 계속 권력을 독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기호남인을 관제야당으로 영입하였다. 북인이 권력을 독차지하였다가 자체 분열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한 반정공신 회맹(會盟)에서 숭용산림(崇用山林), 무실국혼(毋失國婚)을 결의하였다. 정권을 잡으려면 사림의 여론을 존중하고 왕비 자리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서인이 산림(山林)을 장악하고 외척으로서 정권을 손아귀에 넣은 요체이기도 하였다.
남인은 관제야당에 불과하였지만 현종조의 예송(禮訟)으로 서인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였다. 남인은 약세를 의식해 국왕 편을 들었다. 서인은 사대부례(士大夫禮)를 내세워 국왕도 사대부와 같은 예(禮)를 행해야 한다는 데 비해, 남인은 왕조례(王朝禮)를 내세워 왕실의 특수성을 강조하였다. 전자는 송시열을 대표로 하는 서인의 주장인 데 비해 후자는 윤휴를 대표로 하는 남인의 주장이었다. 예론은 이론적으로 전개되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정권을 차지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예론은 곧 당쟁으로 비화되었다. 효종의 서모인 조대비(趙大妃)가 효종이나 효종비를 위해 1년복을 입느냐 3년복을 입느냐는 시시콜콜한 논쟁이었으나, 이것이 왕통(王統), 적통(嫡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정쟁의 주제가 된 것이다. 이로부터 서인과 남인은 극악한 원수지간이 되었고, 당쟁은 치열해 가기만 하였다.
예송 때문에 서인은 정권을 잃고 남인이 집권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같은 서인이면서 송시열의 사림세력과 이해를 달리하는 김석주 등 외척의 지원이 주효하였다. 국왕도 남인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숙종은 이지러져 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서인과 남인을 충돌시켰다. 이것이 숙종조의 잦은 정권교체[換局]의 실상이었다. 서인과 남인의 충돌은 결과적으로 기호남인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정국이 경색되어 가자 체제 자체가 무너질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때 제기된 것이 국왕을 중심으로 당파간에 대타협을 이루는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당파 자체를 타파한 것은 아니었다. 국왕조차도 그러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정조의 탕평책은 서인의 분파인 노론과 소론의 알력을 무마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탕평당이 외척으로 성장해 19세기 이후 외척 세도정치를 초래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사림정치의 틀조차 무너지고 말았다. 노론 가운데서도 안동김씨 등 일부 서울의 외척가문이 국정을 독단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다.
- 2012/04/01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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