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의 실상 1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이라 하였다. 사림정치의 틀은 훌륭한 것이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였다. 상대 세력인 훈구세력이 무너지자 사림세력 내부에 분파가 생겼다. 처음에는 선배와 후배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외척 심의겸(沈義謙)이 사림의 편을 들어 사림이 정권을 잡았으나 후배 사림들은 선배 사림들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공격하였다. 심의겸과 그의 추종자들이 훈구의 때가 묻은 분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이준경(李浚慶)이 죽을 때 예언한 것처럼 붕당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후배 사림들은 스스로를 군자(君子)라 하고 선배 사림을 소인(小人)이라 하여 배격하였다. 이는 결국 선조 8년(1575)에 사림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청년당인 동인이 우세하였다. 동인은 영남세력이 우위에 있었다. 동인이 우세해지자 임진왜란의 책임문제를 둘러싸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다. 남인은 퇴계학통, 북인은 남명학통이 주류였다.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유성룡은 일본과 화친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의병을 일으킨 경상우도의 정인홍 등이 정권을 차지하였다. 전자를 남인이라 하였고 후자를 북인이라 하였다. 서인은 실세를 만회하기 위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조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해 집권하였으나 학통이 다양해 대북(大北), 소북(小北), 골북(骨北), 육북(肉北), 중북(中北)으로 핵분열 하였다. 또한 적장자가 아닌 광해군은 집권명분이 약해 친형인 임해군(臨海君)과 적장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서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등, 인륜에 어긋나는 짓을 감행하였다. 권력을 위해서는 동기간도 죽이고 어머니도 쫒아낼 수 있다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것은 서인에게 반정 명분을 제공하였다. 인륜을 저버리고 후금과 타협함으로써 조선왕조의 가장 큰 명분인 존명사대(尊明事大)를 어겼다는 것이 그 죄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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