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조에 사림정치가 실시되면서 영남계의 동인이 한때 우세하여 정권을 잡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되어 영남 남인계(경상좌도)의 류성룡(柳成龍)은 임진왜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영남 북인계(경상우도)의 정인홍(鄭仁弘)은 서인계의 인조반정으로 몰려났다. 그리하여 인조반정 이후에는 영남세력이 쫓겨나고 다시 기호계의 서인이 한말까지 계속적으로 정권을 차지하였다.
인조의 서인정권은 북인들이 일당독재를 하다가 사분오열된 것을 보고 자체 분열을 막기 위해 기호계의 남인세력과 소북세력을 야당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현종 조의 예송(禮訟)으로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정쟁이 벌어졌다. 이때 같은 기호계 외척세력인 김석주(金錫冑)는 남인을 지원해 송시열의 사림계 서인세력을 일망타진하였다. 서인 내부에 외척의 한당(漢黨)과 사림의 산당(山黨)이 대립한 것이다. 한당은 서울 사람들이고 산당은 충청도 사람들이었다. 이 틈을 이용해 허적 등의 기호계 남인이 몇 차례 정권을 차지한 적은 있으나, 이는 숙종의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신료세력을 서로 치고받게 해 약화시킨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경신환국으로 기호계 남인조차 정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정권은 완전히 서인이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러자 서인이 분열해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 치열한 당쟁을 벌였다. 영조․정조 연간의 탕평책은 이 두 세력을 조정해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정책이었다.
반면, 탕평책이 당쟁을 이완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탕평당을 중심으로 하는 외척세력이 성장해 19세기의 파행적인 세도정치가 자행되어 나라를 망하게 하고 말았다. 이때 외척세력은 기호계 서인 가운데서도 안동김씨․풍양조씨․전의이씨․여흥민씨 등 서울 사람들이 독주하고 있었다. 국왕이나 관료의 독주를 막고 부정부패를 감시하던 사림정치의 틀도 무너졌다. 이에 외척세력은 관직을 팔아먹고 백성을 착취하는 데 급급해 서세동점(西勢東漸)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였다. 극도로 보수화한 이들은 결국 나라를 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 2012/03/2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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