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치주의 (文治主義) 2 └ 성고선생 칼럼

조선시대에는 무관을 누르는 여러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무관은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 이하만 있다. 더 승진하려면 문관의 관계인 문산계(文散階)를 빌려 써야만 했다. 그리고 전쟁이 났을 때 총사령관은 문관이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총사령관을 지낸 강감찬(姜邯贊) ․ 윤관(윤관(尹瓘) ․ 김종서(김종서(金宗․瑞) ․ 신숙주(申叔舟) ․ 유성룡(柳成龍) 등이 모두 문관인 것이다. 명분으로는 전술(戰術)보다 전략(戰略)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점도 있겠지만 군권을 문관이 쥐고 있자는 속셈이었다. 더구나 천인에게는 군사지휘권을 주지 않았고, 국왕숙위를 시키지 않았다.

여자도 7거지악(七去之惡), 삼종짙례(三從之禮) 등을 통해 억누르고, 이서들도 한품(限品), 관복(官服), 예식(禮式) 등을 통해 통제했다. 뿐만 아니라 왕권이 약했기 때문에 환관세력도 약했다. 유교문화가 그러하지만 조선사회는 더욱 그러했다.

사림들의 문치주의에서 생기는 부작용이 당쟁(黨爭)이다. 국왕이 약하고, 무관이 힘을 목 쓰는 상황에서 문관들의 권력투쟁은 당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일찍부터 중국에까지도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정국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외적이 처들어오면 문약(文弱)해서 북쪽에서 처들어오면 남쪽으로, 남쪽에서 처들어오면 북쪽으로 달아났다. 국가안보도 군사력으로 보다는 외교로 해결하려 했다. 사대교린(事大交隣)이 그것이다. 그런데 사대는 잘했는데 교린은 잘 못했다. 문화사대(文化事大)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명나라의 고급문화를 받아들여 문명국가로 자부하고 살았다. 주변의 오랑캐들과는 그져 말성없이 지내주기만 바랐지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몽고(蒙古) ․ 여진(女眞) ‧ 왜(倭) ‧ 거란(契丹) 등이 강성해지면 여지없이 처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문치주의의 외교정책이다.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주도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제도언론인 삼사(三司)이겠지만 그 정점에는 산림(山林)이 있었다. 산림은 반드시 직급이 높은 것도 아니요, 꼭 서울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심산유곡에 있어도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고려의 국사(國師)에 비견된다.

뿐만 아니라 대제학은 국가의 공적인 문한(文翰)을 담당했고, 그 권위는 영의정 못지않게 높았다. “열 정승(政丞)이 대제학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집현전(集賢殿) ․ 홍문관(弘文館) ․ 규장각(奎章閣) ․호당(湖堂)․ 한림(翰林)등 문한기관의 관원들이 청요직(淸要職)으로 높은 대우를 받았고, 이들이 국왕이나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문과에 급제하고 이들 청요직을 역임해야 재상(宰相)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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