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8년의 무신란(戊申亂)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1728년(영조 4) 4월 3일 소론, 남인들이 무신란을 일으켰다. 경기 ‧ 충청도의 이인좌(李麟佐), 경남의 정희량(鄭希亮) ‧ 조성좌(曺聖佐), 호남의 박필현(朴弼顯), 평안도의 이사성(李思成), 함경도의 권익관(權益寬), 중앙의 남태징(南泰徵) 등이 주동이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724년(경종 4) 8월에 경종이 죽었다. 소론과 남인들은 경종이 연잉군이 보내준 계장을 먹고 독살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조가 노론인 김춘택(金春澤)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온건 소론인 이광좌 ․ 오명항 등이 다시 기용되자 급진 소론인 정희량 ․ 박필현 ․ 정세윤 등과 실세남인 이인좌 ․ 조성좌 등이 반란을 꾀했다. 이인좌는 안성 ․ 양성에서 기병해 1728년 3월 15일에 청주성을 점령하고 안성 청룡산(일명 瑞雲山)으로 스며들어 오명항군(吳命恒軍)이 직산으로 이동한 것으로 잘못 알고 관군을 공격했다가 승려와 촌민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인좌는 영조의 친국을 받은 다음 능지처참되었다.

그러나 박필현(朴弼顯) ․ 나만치(羅晩致) 등 호남기병은 전라감사 정사효의 배신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박필현은 상주로 달아났다가 영장 한속에게 잡혀 죽었다. 정희량(鄭希亮)은 이웅좌(李熊佐)와 함께 안동에서 거사하려 했으나 안동사림의 비협조로 안음으로 가서 3월 21일 기병했다. 정희량은 주변 군현병에게 막혀 거창에서 곤양군수 우하형(禹夏亨)에게 참수되었다. 조성좌는 3월 21일 합천에서 기병해 거창 ‧ 함양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는 합천군수 이정필(李廷弼)에게 체포되어 죽었다. 그리하여 무신란은 17여일 만에 사실상 진압되었다.

이 반란은 3월 14일 용인에 은거하고 있던 소론 영상 봉조하 최규서(崔奎瑞)의 고변과 경상감사 황선(黃璿)의 장계에 의해 알려졌다. 조정에서는 소론인 병조판서 오명항을 4도순무사로, 소론인 박문수(朴文秀)를 종사관으로 삼아 2천 명의 군사로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오명항은 이인좌군을 토벌한 후 영남 ․ 호서로 진격했으나 이미 난은 진압된 뒤였다.

이 사건으로 수백명이 죽고, 천 여명이 귀양갔다. 그리고 경상우도는 향후 50년간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노론들은 무신란의 사상적 연원을 남명(南冥) ․ 정인홍(鄭仁弘)학통으로 소급해 경상우도사족을 철저히 탄압했다.

무신란은 노론정권에 대한 소론 ‧ 남인들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그런데 이 반란에는 집권당의 착취에 견딜 수 없던 하층민들이 많이 가담했다. 그리하여 무신란이 홍경래란, 진주민란, 임술민란 동학란 등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무신란은 ‘무신사태’ ‘무신의거’ ‘무신혁명’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나 과도한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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