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준경, 훈구와 사림의 대립 속에서 과도기 정치를 이끌다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조선은 유학의 나라이며 성리학의 나라였다. 그러나 진정한 성리학적 도학정치가 이루어진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다. 성리학적 이상을 현실 정치로 구현하려던 사림은 연산군 시대부터 중종, 명종 대까지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당했다. 그러면서도 훈구파들을 몰아내고 정치권력을 잡았다. 그 혼란한 과도기에 이준경(李浚慶)이 있었다. 그는 중용과 포용의 리더십으로 사림 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준경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이다. 1499년(연산군 5) 홍문관 수찬 이수정(李守貞)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수정은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와 함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사사되었다. 이때 이준경도 연좌되어 형 이윤경(李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16세 때부터 사촌 형인 이연경(李延慶)과 정암 조광조(趙光祖)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으나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파직과 유배를 여러 번 겪었다. 그러나 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등용되어 홍문관직제학, 승정원 승지, 형조참판, 평안도관찰사, 병조 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58년(명종 13)에 우의정에 오른 이후 좌의정을 거쳐 1565년(명종 20) 영의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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