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에 대한 평가 3 └ 성고선생 칼럼

정조때 만든 삼봉집의 목판은 지금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 있는 문헌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132호이다. 대구에서 판각된 이 목판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후손 정병무씨에 의하면 자기의 조부가 대구 용연사(龍淵寺)에 있는 것을 실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대구본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정토사기(淨土寺記)‧칙위발어(勅慰跋語)‧적경원중흥비(積慶圓中興碑)‧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등은 목록만 있고 글은 없다. 그 가운데 정토사기는 지금 전남 장성군 백암산(白巖山) 백양사(白洋寺) 쌍계루(雙溪樓)에 걸려 있다.

이 외에도 경상도 안동 영호루(映湖樓)에 걸려 있는 제영호주(題映湖樓),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옥천리 사나사(舍那寺)에 있는 원증국사석종명(圓證國師石鐘銘) 등은 이 책에는 완전히 빠져 있다.

정도전은 58세에 나이에 비명에 갔지만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는데 중심사상이 되었다. 그를 죽인 태종 조차도 개혁의 기본방향은 정도전의 계획을 따랐다. 신숙주(신숙주)도 삼봉집 후서(後序)에서

“개국초에 무릇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당시 영응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나 그분과 비교할 만한 이는 없었다.”

고 술회하고 있다.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바탕이 되었고, 고려국사(高麗國史)는 고려사(高麗史)의 기초가 되었으며, 심기리편(心氣理篇)과 불씨잡변(佛氏雜辨)은 불교 대신 유교를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삼는데 기여했다. 그 이외에도 한양(漢陽)건설의 기초를 다졌으며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관제를 개편해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갖추는데 공헌했다. 이런 모든 사업이 일개인이 하기에는 벅찬데도 불구하고 격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반대의견을 누르고 이를 달성한 것을 보면 정도전의 국량과 능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개혁과정에서 많은 적을 만들어 천수를 못누린 것은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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