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백제가 찾아낸 대안은 동맹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공들여 동맹체제를 정비해 놓은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이 체제를 가동할 때가 된 것이다.
여기서 백제가 선택했던 1차적인 대안은 일단 동맹세력의 일원인 왜병을 동원하여 신라를 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실성이 고구려에 인질로 간 바로 다음 해인 내물(奈勿) 38년 (393), 30년 동안이나 중지되어 왔던 왜의 신라침공이 재개되었다.
그런데 이 작전은 왜군이 단독으로 수행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이상할 수도 있다. 나중에는 왜군이 임나가라에서 출격했던 게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처음부터 가야를 참가시키지 않고 제외했던 것일까?
여기서 백제의 구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일단 왜군만을 동원한 이유는 전선을 더 확대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야는 신라의 인접지역이다. 이런 지역의 세력을 끌어들이면 이 지역 자체에 또 다른 전선을 형성하는 꼴이 될 수 있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결국 가야를 끌어들인 건 화근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이번 작전은 그 자체로 신라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그저 고구려 편에 붙은 데 대한 압력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치밀한 계획을 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전 자체가 너무 구태의연했다.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있다가 며칠 후 철수해버리는 전술을 그대로 썼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신라 측에서 곱게 대처해주려 하지 않았다. 이전만 하더라도 왜가 쳐들어오면 직접 맞아 싸우거나 철수하는 적의 뒤를 쫓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이전 시기 왜병의 침공이라는 건 왜의 필요에 따라 단독으로 침공해오는 데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신라가 특별한 타격을 입을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이 때는 다르다. 공격해오는 건 같은 왜병이지만, 주변 상황이 다르다. 하필 실성이 고구려에 인질로 간 다음해부터 침공이 재개된 것부터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제 신라의 적은 왜 혼자가 아니다.
이번 침공의 배후에는 고구려에 접근하는 나라는 뜨거운 맛을 볼 줄 알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걸 그대로 참고만 있으면 국내외에 대책 없는 외교로 백성들만 고생하게 한 정권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처럼 왜병이 별 볼일 없는 전력이라고 참고 견디면서 적이 지치기를 기다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게 비치지 않기 위해서는 침공군에 뭐가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다시 오지 못할 만큼의 타격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한 타격을 주려면 그냥 뒤를 쫓는 정도로는 안 된다. 나름대로 대책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세워진 대비책은 대략 이런 것이다.
이번에도 농성하며 왜병이 물러나기를 기다린 데까지는 같다. 내물왕은 오히려 나아가 싸워보자는 장수와 병사들을 달래기 바빴다. 하지만 왜병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기병 200명을 앞질러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보병 1천으로 추격했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왜군은 이 협공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기록상, 신라가 이렇게 포위해서 가두어 놓고 섬멸시키는 작전을 구사한 건 이때가 처음이다. 그만큼 단단히 벼르고 왜군을 맞았다는 뜻이다.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전략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
- 2011/11/2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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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또 시작이라니요
저번에 오신 님들은 환까들이었는데
이분은 이 분은 환까가 아니라 환빠네요
환까가 다 물러나니 이제 환까의 공격
안시성님아 라디오 교육 좀 시켜라 블레이드님은 환까의 안티라고 말야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분 같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도 환빠도 아니고,강단사학도 아니다.
객관적으로 역사를 보려고 노력할뿐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 혹시 뭐하시는 분인지 알고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