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택지적(沙宅智積)의 정계은퇴가 어지러운 정치 탓? └ 역사일반

이런 식으로 현대 백제사 전문가들은 백제라는 나라가 했던 일마다 족족 문제를 삼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백제사 전문가들이 백제를 이 정도 깎아 내린 것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기록에 나오지도 않는 이야기들은 지어내기로 작정했다.

그 첫 번째 경우가 백제 좌평이었던 사택지적(沙宅智積)의 정계은퇴 문제다. 이를 두고 어떤 백제사 전문가는 의자왕의 정치적 한계가 나타난 결과라고 몰아가기까지 한다. 의자왕이 즉위한 다음 의욕적인 개혁정치를 추구하기는 했지만, ‘귀족세력의 견제’때문에 한계가 드러났다는 얘기가 되겠다. 사택씨의 존재를 문제 삼는 논리를 그대로 인용해보자.

대좌평 사택지적이 내지성(奈祗城)으로 은퇴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세(事勢)에 밀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씨 세력은 여전히 대귀족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백제 멸망시에 왕과 더불어 포로로 된 자 중에 대좌평·대수령(大佐平·大首領) 사택천복(沙宅千福)이 있었다는 데에서 추지(推知)할 수 있는 바이다. 사씨의 존재는 왕권이 전대(前代)에 비해 비록 강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들 귀족들의 견제력도 만만치 않았음도 시사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귀족들은 왕의 전제적(專制的) 권력행사(權力行事)에 대해 성충과 같이 투옥을 무릅쓰고 극간(極諫)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곧 의자왕의 정치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백제정치사연구에서 사택씨의 존재를 귀족세력의 왕권 견제로 보는 근거의 전부다. 하지만 이게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이 내용은 아무리 좋게 보아주더라도 사택씨가 백제의 유력한 귀족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근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강력한 귀족 세력 사택씨가 왕권을 견제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없다. 그런데도 있지도 않은 내용을 근거로 삼아 ‘의자왕의 정치적 한계’를 제멋대로 만들어내 버린 것이다.


덧글

  • 노송인 2012/08/08 16:52 # 답글

    沙宅智積. 사택千福이라는 人名이 원문입니까? 음(훈)을 하나로 표기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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