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산성주 망명사건 2 └전쟁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지도 않은 백제가 이 사건을 크게 문제삼지 않은 건 뭔가 다른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근초고왕으로서는 아무리 괘씸해도 여기에 집착할 상황이 아니다. 신라 이외에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우선 호시탐탐 백제를 노리고 있는 고구려를 의식해야 한다. AD 371년,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곧바로 보복전을 감행했다. 이런 긴장 상태가 계속되는 한 고구려 전선에의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거기에 세력권으로 들어온 가야 지역 경영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완전히 백제로 편입시키는 정책이 아니기 때문에 왜나 가야의 여러 나라도 원칙적으로는 외교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보통 신경 쓰이는 문제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신경 쓰이는 문제가 많이 발생했던 것도 그만큼 백제의 팽창정책이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제는 이미 벌만큼 벌어 놓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백제가 한반도 남부에 세력확장을 꾀한 의도는 배후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지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라에 지나칠 정도의 압력을 넣는 것은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주 하나와 백성 300명 때문에 신라와 전면적인 분쟁이 벌어진다면 일이 훨씬 복잡하게 꼬여버린다. 근초고왕으로서는 이 정도의 일로 공연한 말썽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만한 상황이었다. 이미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장악한 마당에 거기에 영향을 줄만한 어떠한 말썽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물왕이 힘도 별로 없으면서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상황을 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백제의 인내심도 곧 한계에 다다르는 사태가 발생했다. 광개토왕의 즉위에 즈음해서 후에 왕이 된 실성(實聖)이 인질로 가버린 것이다. 이건 그냥 참아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독산성주 망명사건이야 기본적으로 백제와 신라 양국에 국한된 문제다. 또 문제의 본질도 소수 인원이 귀순한 데 불과하다. 백제가 참아 넘기기만 하면 크게 확대시키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실성이 고구려에 인질로 간 사건은 독산성주 망명사건과는 차원이 다르다. 실성은 차기 대권을 이어 받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인질로 간다는 사실은 이후 고구려-신라 관계 발전에 엄청난 파장이 생긴다.

신라라고 그걸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강행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독산성주의 망명사건을 처리하면서부터 이미 백제의 신경을 건드려 놓았다. 신라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가 당장은 문제삼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기회가 오면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신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제공자가 백제였기에, 보복하기 위해서는 물론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고구려에 접근하는 것말고는 달리 길도 없었다.

그러려면 일단 광개토왕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실성이 인질로 간 시점이 하필 광개토왕의 즉위시점과 비슷하다. 광개토왕이 즉위하자마자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이 이어졌던 사태와도 무관하지 않다. 광개토왕의 입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백제와의 전쟁을 시작하는 김에 신라도 확실하게 동맹으로 묶어둘 필요가 있다.

여기에 또 다른 요소도 작용했다. 이 때 신라 내부의 정치상황도 단순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성은 내물과 정치적 계열이 달랐다.

나중에 실성이 왕이 되어 내물의 아들들에게 보복 차원에서 자신과 똑같이 인질로 보내버리고, 그리고도 모자라서 나중에 눌지를 살해하려는 시도까지 한 점을 보면 갈등이 어지간히 심했던 모양이다. 내물의 입장에서는 이런 관계에 있는 정적(政敵)을 인질로 보내버려 일시적으로나마 국내 정치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노릴 만 했다.

어쨌든 이런 저런 요인이 작용해서 고구려와 신라는 광개토왕의 즉위를 계기로 확실한 동맹체제로 발전했다. 백제-가야-왜 동맹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으니, 고구려-백제 전쟁의 시작은 결국 두 동맹체의 대결로 이어질 게 뻔했다. 미·소를 중심으로 이른바 냉전체제가 성립했던 것 같은, 일종의 ‘양극화’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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