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고구려에 접근하는 게 백제의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당기간 백제는 신라의 불만 섞인 외교행각을 애써 눈감아주려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백제 독산성주(禿山城主)의 망명사건이다. 사건은 AD 373년 백제의 독산성주가 300명의 백성을 이끌고 신라로 귀순하면서부터 일어났다. 지금도 주요 요인(要人)의 망명사건이 터지면 으레 그렇듯이, 본국에서는 요인이 망명한 나라에 송환요청을 한다.
근초고왕도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는데, 지금 도망한 우리 백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화친한 뜻에 어긋나니 돌려보내 달라’며 점잖게 독산성주의 송환을 요구했다. 그런데 내물왕은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어서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이다. 대왕(근초고왕)께서는 백성이 편치 않음을 걱정하지 않고 왜 과인을 나무라는가?’라며 딱 잘라 거절해버렸다.
단순히 일개 망명객에 대한 시비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심각한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백성 300명이라는 의미가 현대에서 보는 것과는 틀린다. 요즘 같으면 그 정도의 귀순인원은 난민이라고 찬밥 취급받는 게 고작이겠지만, 당시는 사정이 다르다.
지금은 국가가 국민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가 강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국에 적응 못하는 국민에 대해서는 부담만 느낀다. 그래서 웬만큼 사는 나라는 싫다고 떠나는 백성을 굳이 잡지 않는다. 떠나고 싶어하는 백성을 강제로 붙잡는 나라는 적어도 현대국가로서는 볼 장 다 본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백성이 나라의 자산(資産)이라는 의미가 강했던 시대다. 지금은 세금을 거둬가도 ‘국민의 복지’를 위해 써야 한다는 압력이라도 받지만 당시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다. 정권이라는 것도 심하게 말하자면 백성을 착취해서 유지되는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백성을 잡아다가 멀리 끌고 와 자국(自國)에서 정착하게 하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백성들을 다른 나라로 끌고 가 버리면 그건 나라의 자산을 훔쳐 간 것이나 다름 없다. 독산성주의 망명사건을 접한 백제의 입장에서는 도둑 맞았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한 사건이다. 이걸 비호하는 신라가 괘씸해도 보통 괘씸한 게 아니다.
이 사건이 있기 훨씬 전이기는 하지만, 신라도 아찬 길선(吉宣)이라는 자가 백제로 망명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신라는 백제에 길선에 대한 소환요청을 했고,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쟁을 일으켰다고 한다. 신라는 이와 같이 자국인 한 사람의 망명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과거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망명객에 대한 소환요청은 딱 잘라 거절해버린 셈이다.
이 사건이 실제의 백제와의 관계에서 있었던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나중에 백제 세력권으로 들어온 마한과의 사건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어쨌건 신라와 관계된 외교분쟁에서 파생된 사건이니, 근초고왕 대의 백제가 이런 관례를 전혀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가 문제를 삼고 나오면 심각한 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이에 대해 강경한 태도로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이대로 끝이 났다. 백제가 독산성주와 백성들의 귀순을 인도적 차원의 사건이라고 인정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신라의 이권을 빼앗은 데 양심의 가책 같은 걸 받아서 그런 것도 아니다.
- 2011/11/19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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