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외교 4 └ 성고선생 칼럼

한편, 조선에서는 사대에만 힘썼지 교린에는 소홀했다. 문화가 낮은 일본․몽고․여진․과는 그져 평화적인 관계만 유지하는데 급급했지 적극적인 외교를 벌리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국에서 적극적으로 접근하려고 애썼다. 그들의 요구사항은 유교경전․불경 등의 서책과 생필품의 무역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소극적이었다. 그들과 너무 가까이 하면 중국의 오해를 살 소지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명나라의 쇄국정책으로 조선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중계무역의 이득을 노릴 수 있었다. 조선은 사신이 왕래할 때 조공무역(朝貢貿易)으로 서책․약재 등 문화상품들을 사다가 동래왜관(東萊倭館)에서 일본인들에게 10배 이상의 값을 받고 팔았던 것이다. 이것은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중국의 문호가 열린 17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이 이들과의 교역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불평은 컸다. 이들은 생필품을 얻기 위해 조선과의 무역이 긴요했다. 그리하여 자주 교역을 요청하다가 뜻대로 안되면 침략해 오기 일쑤였다. 이들의 세력이 강해질 때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전란은 이들과의 불화 때문에 생겼다. 임진왜란이나 정묘․병자호란은 그 중 가장 큰 전란이었고 그 이외에도 이들의 잦은 침략을 받았다. 특히 소규모의 왜구(倭寇)의 침략은 더욱 잦았다. 세종 초에는 이들의 침략을 근원적으로 맊기 위해 이들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친 바 있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이들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고, 곡물을 비롯한 생필품을 주기도 했으나 만족할만한 정도는 못되었다. 특히 대마도(對馬島)는 땅이 척박하고 산물이 부족하여 가까운 조선과의 무역을 갈망했다. 조선의 도움을 받기 위해 무작정 오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거주지를 동래왜관에 제한하고, 일부에게 증명거(圖書)를 발급하여 그들에 한하여 무역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들은 교역의 제한을 풀어 줄 것을 요청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삼포왜란(三浦倭亂)과 같은 변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여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요구로 압록강 중류에서 중강개시(中江開市)를 열어주었던 것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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