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권한을 왕에게 집중시키는 것과 아울러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해야만 했다. 왕 혼자 모든지역을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전국토를 300 여개의 군현으로 나누어 여기에 왕을 대신하여 통치할 수령(守令)들을 파견했다. 그리고 이들의 비리를 적발하기 위해 8도(八道)에 관찰사를 두어 감시하게 하거나 각종 어사(御使)를 파견하여 비리를 적발하게 했다. 고려시대에는 지방 재지세력인 향리(鄕吏)의 영향력이 강하여 군현의 크기가 향리세력 여하에 따라 들숙날숙 하던 것을 조선 초기에 이르러 인구와 토지비례에 따라 군현을 재편하고 모든 군현에 중앙관료를 수령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중앙뿐 아니라 지방에까지 관료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학교제와 과거제를 정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초기에 와서 문과와 잡과 이외에 무과를 설치하고 비교적 공정한 각종 시험제도와 인사제도를 정비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들은 모두 왕의 관료들이었다. 과거시험의 최종시험관도 왕이었으며, 이들을 관료로 임명하고 해임하는 것도 왕이었다.
그런데 국가의 모든 일을 실제적으로 담당한 것은 양반 사대부들이었다. 양반이란 관직에 있어서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의미했다. 그러나 문치주위(文治主義) 사회였던 조선 사회에 있어서는 칼을 든 무신(武臣)보다 붓을 든 문신(文臣)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식인관료들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문치주의는 중앙집권체제를 수반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신라 통일 이후에 중국(당나라)으로부터 받아들였다. 7세기 말 8세기 초에 중국과 일전하여 패배한 이후 생존의 방편으로 중국화의 길을 선택했고, 이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앞선 문화를 받아들여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지식인관료가 정치주체가 되는 중앙집권적 문치주의는 고려․조선의 가장 중요한 정치체제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러한 문치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고려왕조 500년간을 소비했으며, 조선 초기에 이르러 세계의 유례없는 전형적인 문치주의체제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조선왕조의 정치주체인 양반 사대부들은 어떠한 계층이었는가? 원래 사대부(士大夫)는 문관관료를 의미했다. 문관 5품 이하를 사(士), 4품 이상을 대부(大夫)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관관료가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에서 문관을 지칭하는 사대부가 무관관료까지 포함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중국 송나라 때 양자강 이남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중소지주층이 지식을 바탕으로 중앙정계로 진출했는데 이들을 또한 사대부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사대부는 역사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의 사대부는 중기 이후로 차차 그 외연을 넓혀가 독서인층(讀書人層)을 포괄하는 사림(士林)으로 확산되었다. 이들은 세조조 이후로 성장한 훈신세력과 대결하여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승리하여 사림정치의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상대세력인 훈신세력이 무너지자 자체분열하여 붕당이 생기고 붕당간에 치열한 당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후 당쟁이 치열해져 국가가 망할 조짐을 보이자 왕권을 강화하여 당파를 고루 기용하는 탕평정치가 실시되었고, 탕평에 찬동하는 탕평당이 외척권신으로 성장하여 서울의 몇몇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외척세도정치가 실시되게 되었다. 그리고 견제세력이 없는 세도가문들이 부패하고 외세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만 것이다.
- 2011/11/1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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