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중 제학 이상은 겸관이었고, 부제학 이하만 전임직인 녹관(祿官)이었다. 태종이 쓰던 신하들은 집현전의 상위에, 자기가 뽑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은 집현전의 하위에 두었다. 집현전의 녹관을 젊은 사람들로 채운 것은 이들을 유용한 인재로 기르기 위해서이다.
집현전의 관원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문사(文士)들로 구성되었음은 물론이다. 집현전의 관원은 종신토록 다른 관청으로 옮겨 갈 수 없게 했으며, 그들의 전문지식을 높이기 위하여 필요할 경우에는 휴가를 주어 공부하게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주기도 했다. 신숙주․성삼문․이개․하위지․이석형 등은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홍응․서거정․이명헌 등은 장의사(藏義寺)에서 공부했다. 이 제도는 뒤에 홍문관을 세웠을 때 답습되었다가 독서당(讀書堂)제도로 발전했다. 그리고 집현전의 관원은 조회에서 같은 품계 중에서 서열이 가장 앞서는 반두(班頭)가 되게 했으며, 집현전에 궐원(闕員)이 생기면 집현전․이조의 당상관과 의정부에서 그 후보자를 추천하게 했다. 집현전 관원은 궁중 안에서 근무하였으며, 아침과 저녁은 궁중의 내관이 공급했다.
세종은 집현전 관원들로 하여금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편의를 보아주고, 음식을 내려 주는 등 우대했으나 이들도 관료인지라 인사 부서나 언론 부서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종신 토록 집현전에서만 근무하라는데 대하여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집현전에 들어오면 부제학에 이를 때까지 수 십년 씩 한 직장에서만 근무해야만 하니 진력이 나기도 했을 것이다. 집현전 관원 중에 말단에서부터 직제학까지 이른 사람이 16명, 부제학까지 이른 사람이 30명이나 되었으며, 10년-14년간 근무한 사람이 15명, 15년-19년간 근무한 사람이 10명, 20년-24년간 근무한 사람이 5명, 25년 이상 근무한 사람이 1명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신석견(辛石堅=石祖)은 가장 오랜 기간인 27년간이나 집현전에 근무했다.
그러나 이들의 불평을 듣고 세종은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집현전을 설치한 것은 전적으로 문한(文翰)에 종사시키기 위해서이다. 일찍이 정미년 (1427=세종 9) 친시(親試)에 집현전 관원이 많이 합격하여 내가 대단히 기뻐하면서 이것 은 반드시 늘 문한에 종사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근래 들으니 집현전 관원들이 거의 모두 이것을(집현전에 근무하는 것을)싫어하여 대간(臺諫)이나 정조(政曹)의 직을 희망하 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 나는 집현전을 중요한 관직이라고 여겨 특별히 대우하여 대간 과 다를 바 없다고 보는 데 일을 싫어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또한 이와 같으니 하물며 보통 관직에 있어서랴! 신하된 사람으로 봉직(奉職)하는 뜻이 과연 이와 같은 것이냐? 너희들은 게으른 마음을 갖지 말고 종신 토록 학술에 전념하라.”
- 2011/11/11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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