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性理學)의 수용과 내포 2 └ 성고선생 칼럼

이색은 불교는 본래 좋은 것이지만 승려들이 타락하여 피해가 심하니 불교적 윤리관을 유교적 윤리관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온건한 개혁을 주장했다. 도첩제(度牒制)를 강화하고 성균관을 부흥시키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정몽주 이숭인 박상충 정도전 권근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나 이성계를 추종하는 정도전과 그를 따르는 기타 제자들의 대립으로 말년을 불우하게 보냈다. 저서로는 목은집(牧隱集) 목은문고(牧隱文藁) 목은시고(牧隱詩稿) 등이 있으며, 묘는 서천 죽혼리에 있고 서천군 한산의 문헌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종덕(李種德) 이종학(李種學)은 그의 아들이다. 이종학은 정도전이 손흥종(孫興宗)을 시켜 이숭인(李崇仁)과 함께 살해했다.

이색의 후손으로는 이자(李耔)‧이개(李塏)‧이지함(李之函) 등이 있다.

이개(1417-1456)는 이색의 증손자요, 이종선(李種善)의 손자이며 이계주(李季疇)의 아들이다.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으로 1436년(세종 18)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41년(세종 23)에 집현전(集賢殿) 저작랑(著作郞)이 되어 명황계감(明皇誡鑑)의 편찬에 참여하고, 1444년(세종 26) 집현전 부수찬으로서 훈민정음(訓民正音) 제정에 참여하여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했으며, 1447년(세종 29) 9월에는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 참여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부탁하고 승하하자 1456년(세조 2) 노산군(魯山君) 복위 운동을 벌이다가 죽임을 당했다. 1691년(숙종 17)에 와서 그를 비롯한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되고 사육신이 공인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충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자(1466~1524)는 대사간 이예견(李禮堅)의 아들로 1501년(연산군 7)에 진사시에, 1504년(연산군 10)에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중종반정 이후에 벼슬살이를 했다. 그는 훈구파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갈등을 조정하는데 힘쎴다. 그러나 1519년(중종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되어 음성‧충주 등지에 은거했다. 기묘명현록(己卯名賢錄)에 올랐고 저서로는 음애일기(陰崖日記)‧음애집(陰崖集)이 있으며 충주의 팔봉서원(八奉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독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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