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 수정 내용 비교 연구의 문제점 4 └ 역사일반

또 다른 가능성도 제기될 수 있다. 禮元을 體元으로 수정했던 당사자가 박창화가 아니었을 가능성이다. 花郞世紀 필사본은 박창화의 死後, 한동안 김종진의 손에 있었다. 『花郞世紀』 필사본이 자신의 손에 있는 동안 김종진이 일부 교정을 보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모본’이 쓰여진 종이는 20세기 초 일본 궁내부에서 사용된 것임에 비하여 ‘발췌본’이 쓰여진 종이는 1950년대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앞으로 『花郞世紀』 필사본의 모본과 발췌본의 수정내용을 가지고 위작 시비가 붙는다면, 이런 문제에 대한 검토 역시 필요할 것이다.

결국 김기흥은 수정의 배경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외하고 나서 발췌본이 먼저 만들어졌다고 단언한 것이다. 고의던 아니던 자신의 결론을 뒤집어 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골라 제외해버린 셈이다.

20세 풍월주인 體元에 대한 모본의 수정 내용에 이해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주장도 근거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에 대한 김기흥의 주장은 이렇다.

體元이 풍월주에서 물러나 禮部를 거쳐 調府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선덕여왕에게 잘 보여 衿荷臣이 되었다는 내용 중 衿荷臣이 內省私臣으로 수정되었다. 저본의 착오나 참고한 사본들의 차이가 있어서 ‘禮元’과 ‘體元’이 혼동될 가능성은 양해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관청과 관직인 調府의 衿荷臣과 內省私臣이 혼동되어 전해질 이치가 없기 때문에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體元 이외에도 인명을 수차례 수정한 사실을 가볍게 볼 수 없으며 그리 흔쾌하지 않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사람의 착각 가능성을 애써 배제하고 나온 논리다. 사실 인간의 눈이나 귀가 그다지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상식에 속한다. 전혀 다른 관청과 관직인 調府의 衿荷臣과 內省私臣이 혼동되어 전해질 이치가 없다고 하지만, 사람의 착각에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착각을 하다보면 글자나 직책상의 연관성 같은 것을 따지면서 착각하지 않는다.

필자가 구술자료 조사를 해본 경험을 통해서도 이러한 점을 확인해본 경험이 있다. 녹취록을 만들 때, 녹음된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데도 이게 왜 들어갔나 싶은 글자나 문장이 들어가는 경우가 흔하다. 사람 이름이나 지명 관직명 등을 엉뚱하게 착각하는 것은 다반사이다. 눈으로 보고 베끼는 작업이라고 그리 큰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보면 필사하는 과정에서 멀쩡한 글자를 엉뚱하게 인식하거나, 다른 칸 또는 다른 줄에 있는 글자를 잘못 읽고 옮겨 버리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라고 할 수가 없다. 명색이 글 쓰는 사람이라면, 책 한권을 쓰는 데에도 얼마나 많은 수정과 교정을 보면서 오류를 잡아내야 하는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박창화라고 착각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발상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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