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性理學)의 수용과 내포 1 └ 성고선생 칼럼

고려말에 내포의 지식인들은 성리학 수용에 앞장섰다. 그 중에서 성리학을 처음으로 연구 보급한 백이정(白頤正)의 묘소는 보령군 웅천면 평리 양각산(羊角山)에 있으며 그곳에 그를 모신 신안사(新安祠)와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성리학을 수용하는데 정치적으로 앞장선 사람은 안향(安珦)이지만 원나라에 10년간 있으면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돌아와 이를 가장 먼저 연구․보급한 사람은 백이정이다. 그리고 백이정의 뒤를 이어 성리학 보급에 크게 기여한 것은 이곡(李穀)․이색(李穡)부자를 비롯한 한산이씨(韓山李氏)가문이다.

이곡(1298~1351)은 1317년(충숙왕 4)에 거자시(擧子試)에 합격한 뒤 1332년(충숙왕 복위 1) 원나라의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원의 학자들과 교류했다. 그 뒤 귀국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으며 이제현(李齊賢)․민지(閔漬)등이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중수하고, 충열․충선․충숙의 삼조실록(三朝實錄)을 편찬했으며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수했다.

그의 본관(本官)은 한산(韓山)이며 한산 문헌서원(文獻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저서로는 가정집(稼定集) 4책 20권이 있다. 안향‧백이정이 들여온 성리학을 이해하는데 앞장선 성리학의 이해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이색(1328~1396)은 이곡의 아들이요, 백이정의 제자인 이제현의 제자로서 역시 1352년(공민왕 1) 원나라 정동행성 향시에 1등, 1354년(공민왕 3) 제과(制科)에 1등으로 합격하여 그곳에서 벼슬살이도 하고 성리학을 공부했다. 귀국한 이후에는 1363년(공민왕 12)에 정동행성 유학제거(征東行省 儒學提擧)로서, 1367년(공민왕 16)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서 성균관 겸대사성(成均館兼大司成)을 겸직하여 성균관 중흥에 앞장섰고,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당시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은 겸교관(兼敎官)으로서 이색을 도왔다. 그리하여 1373년(공민왕 22)에는 한산군(韓山君)에 피봉되었다.

그러나 1389(우왕 14) 위화도회군 이후로 이성계(李成桂)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昌王)을 옹립했다가 이성계 일파에게 밀려 여러 차례 귀양을 갔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피봉되었으나,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는 도중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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