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의 자연환경 └ 성고선생 칼럼

그러나 바다 가까운 곳에 학질과 염병이 많다. 산천이 비록 평평하고 넓으나 수려한 맛이 적고, 구릉(丘陵)과 원습(原濕)이 비록 아름답고 고우나 천석(泉石)의 기이한 경치는 모자라다. 그 중에서 보령(保寧)의 산천이 가장 아름답다. 고을 서편에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이 있고 그 안에 영보정이 있다.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활짝 트여서 명승지라 칭한다. 북쪽에는 결성(結成)․해미(海美)가 있고, 서쪽에는 큰 개(大浦) 너머로 안면도(安眠島)가 있다. 3읍은 가야산의 서쪽에 위치한다. 도 북쪽에는 태안(泰安)과 서산(瑞山)이 있다. 강화(江華)와 남북으로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 서산 동쪽은 면천(沔川)과 당진(唐津)이며, 동쪽으로 큰 개(大浦)를 건너면 아산(牙山)이다. 북쪽으로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경기의 남양(南陽) 및 화량과 비스듬히 마주하고 있다. 이 4읍은 가야산의 북쪽에 위치한다. 가야산의 동쪽은 홍주(洪州)와 덕산(德山)이다. 모두 유궁진(由宮津)의 서쪽에 있는데, 개(浦) 동쪽의 예산(禮山) 신창(新昌)과 더불어 뱃길로 한양(漢陽)으로 통한다. 대흥(大興)은 곧 백제의 임존성(任存城)이다. 이 11고을은 모두 오서산의 북쪽에 있다.”

이 글에 의하면 내포의 중심지는 가야산이고, 가야산 앞뒤의 10고을을 내포라 했다. 즉 가야산의 서쪽에 보령‧결성‧해미의 3고을이 있고, 북쪽에 해안‧서산‧면천‧당진의 4고을이, 동쪽에 홍주‧덕산‧예산‧신창의 4고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가야산 앞 뒤 10고을을 내포라 한다고 하였으나 구체적으로는 11고을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10여 고을쯤 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내포의 포(浦)는 유궁진(由宮津)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최남선(崔南善)도 “내포라 함은 충청도 서남우(西南隅)의 가야산맥을 환요(環繞)하여 있는 여러 고을을 시방 삽교천(揷橋川)의 상류, 유궁진의 안녁에 있다 해서 이르는 말”이라 했다. 일본사람들은 금강(錦江)유역을 내포지방이라 했지만, 이는 잘못된 서술이다.

내포지역은 바다를 끼고 있고 바다 물이 역류하여 많은 포구(浦口)가 발달되었다. 따라서 해운(海運)에 편리하여 일찍부터 조운로(漕運路)가 발달했다. 전라도 법성창(法成倉)에서 출발한 조운선(漕運船)이 보령 앞 바다를 거쳐 태안의 안흥량(安興梁)과 당진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안흥량은 암초가 많고 조류(潮流)가 빨라 선박의 통행이 어려웠다. 그리하여 배가 전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고려 1134년(인종 12)과 1391년(공양왕 3)에 천수만과 가로림만 사이에 조거(漕渠)를 뚫으려다가 실패했다. 중종조(中宗朝)에는 의항운하가 굴착되어 일시 사용되기도 했다. 인조조(仁祖朝)에도 안면곶을 끊어 안면도를 섬으로 만들면서 백사수도(白砂水道)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 결과 안면도의 내해에서 직접 배가 서해로 나갈 수 있어서 200여리를 도는 뱃길을 단축할 수 있었다. 반면에 육로 교통은 금북산맥(錦北山脈)에 막혀 주요 역로(驛路)에서 빗겨나 있었다. 그러나 가야산을 제외하고는 높은 산이 없어 외지기는 하지만 육로교통도 그리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해로 육로의 교통이 편리하여 서울로 가기가 쉬워 서울의 사대부들이 많이 옮겨 살았다. 또한 농업과 어업이 발달하고 서해로 중국과 직통할 수 있어서 명문(名門) 거족(巨族)들이 누대로 많이 살았다. 그리고 선진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서 선진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출중한 사상가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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