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대첩을 대승으로 이끌다 └ 성고선생의 역사이야기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을 상대로 싸우다 물러서고, 다시 싸우다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겉으로는 수나라군의 연승이었다. 그러나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을지문덕의 전략은 군량이 떨어져 지친 수나라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나라군은 평양성 근처까지 진군했으나 평양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을지문덕은 다시 한 번 ‘군대를 물리고 영양왕과 함께 조회하겠다’라는 거짓 항복서를 적진에 보냈다.

적장들은 이를 구실로 서둘러 철군을 시작했다. 그들도 당연히 을지문덕의 계략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전의를 상실한 군사들을 이끌고 더 이상의 전투를 진행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평양성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적군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을지문덕은 때를 놓치지 않고 역공을 감행했다. 뒤를 쫓아오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행군하던 수나라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결국 살수에 이르러 고구려군의 총공격을 받은 수나라군은 궤멸하고 말았다. 이때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은 수나라 병사가 수만 명에 달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동사강목》에는 살수대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살수에 이르러 수군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수의 후군을 추격하니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고, 군사들이 다 괴멸되어 수습할 수 없었다. 장사들은 도망쳐 하루 낮 하루 밤 만에 압록수에 이르니, 450리 길을 간 셈이다. 장군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고구려군을 반격해 물리쳤다. 고구려군이 백암산(白巖山)에서 설세웅(薛世雄)을 포위하니, 세웅이 분격해 물리쳤다. 내호아(來護兒)는 문술 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고, 오직 위문승(衛文昇) 1군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구군(九軍)이 요(遼)에 이르렀을 때에는 30만 5천이었는데 돌아갈 때 요동성에 이른 것은 2천 700인이었다.

《동사강목》 제3상

살수대첩의 대승으로 고구려는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나라의 자존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살수대첩이 과연 수공(水攻)이었는가의 의문이 남는다. 현대의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종종 살수대첩을 상류의 물을 막았다가 적군이 강을 건널 때 한꺼번에 물을 흘려보내 익사시킨 수공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고구려군이 살수대첩에서 수공을 펼쳤다는 것을 고증할 만한 역사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으로 적진을 교란하고, 식량이 부족한 적군이 지칠 때까지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시간을 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후미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막강한 수공이 아니더라도 그 뛰어난 지략과 전술을 충분히 높이 살만하다.

살수대첩 이후 수나라는 두 차례 더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물러났다. 중국을 통일하고 주변의 이민족들을 복속시키며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수나라는 그렇게 고구려의 저항에 무릎을 꿇었다. 또한 이것은 수나라의 존립 자체마저 위협하게 되었다.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무리하게 고구려 원정 공격에 나선 것이 원인이었다. 나라 안팎으로 흉흉해진 민심이 반란으로 이어졌고, 결국 수나라는 618년(영류왕 즉위)에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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