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화(西歐化)의 시련 3 └ 성고선생 칼럼

그러면 일본은 어떠했나? 1853년 일본의 동경만‧우라가(浦賀) 항구에 미국 동인도 함대사령관 페리제독이 타고온 흑선(黑船;구로부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다. 물론 에도 정부에서는 저항했다. 그러나 이때 죠슈번(長州藩)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25세의 젊은 나이에 페리제독을 찾아가 미국으로 내려갈 것을 요구했다가 실패한 후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와 고향에 쇼가손주쿠(松下村塾)을 열어 개화파들을 길러냈다. 그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자살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같은 제자들이 나와 일본근대화에 앞장섰다. 죠슈번에 이어 사스마번(薩摩藩)에서도 개화파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오쿠보 토시미츠(大久保利 )‧사이고 다가모리(西御隆盛)등이 그들이다. 도사번(土佐藩)의 사카모도 료마(坂本龍馬)등도 그러한 인물이다. 이들은 1868년에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성공시켜 군함을 만들고 해군을 육성하는 등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일본은 고구려‧백제가 멸망할 때 해군을 파견했다가 실패 한 후 큰 타격을 받고는 중국화를 포기한 채 독자노선을 걸었다. 사무라이의 무치주의(武治主義)를 존속시키고 봉건제(封建制)를 유지했다. 무사도(武士道)에 바탕을 둔 군사국가를 만들고 상업과 무역을 장려했다. 이것은 왜구(倭寇)와 같은 해적행위로도 나타났다.

일본의 이러한 체제는 어느 면에서 서구의 무사도‧봉건제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래서 서구화에 유리했는지도 모른다. 에도(江戶)정부에서 유교를 신봉했다고는 하지만 골수화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과 한국의 골수화된 유교에 비하면 유연성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제국주의시대에 탈 아세아론(脫亞細亞論)을 주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번주(藩主)가 중앙의 쇼군(將軍)의 지휘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중국이나 한국의 중앙집권체제에서 처럼 철저한 지휘‧감독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기의 번(藩)을 발전시키고 다른 번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개항과 서구문화 수용을 행할 수도 있었다. 이것이 파급되면 근대화로 접근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페리제독이 온 후 16년만에 명치유신을 이룬데 비해 조선은 쇄국으로 일관했다.

물론 그 기간동안 조선에도 근대화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규수(朴珪秀)‧유대치(劉大致)‧오경석(吳慶錫)‧이동인(李東仁)등 개화파가 싹트기는 했으나 국내의 지지기반이 약해 외세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실패로 돌아갔다. 이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해외로 망명할 수 밖에 없어 근대화는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먼저 서구화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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