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정치는 중간관료들이 언론권과 인사권을 분점(分占)하고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는 재상들이 언론권과 인사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물론 인사권은 국왕의 전유물이었지만 신료세력이 강한 당시에는 실제적인 인사권은 재상에게 있었다. 언론권도 재상들이 왕권을 견제하는 데 동원되었다.
그러나 사림세력이 성장하면서부터 재상들의 언론권․인사권을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재상들에게 위압을 받던 국왕도 이를 지지하였다. 사림세력을 이용해 재상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언론 3사(言論三司)의 하위직에 사림들을 기용하고, 이들로 하여금 언론권을 장악하게 해 훈구파 재상들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조․병조의 과장․계장급인 정랑(正郞)과 좌랑(佐郞) 각 3명에게 당하관(3품 이하 관료)의 인사권을 부여해 재상들의 인사권 독점을 방지하게 하였다. 이들을 전랑(銓郞)이라 하며, 이들의 인사권을 당하통청권(堂下通淸權)이라 한다.
전랑을 비롯한 중간관료들은 자기의 후임자를 스스로 선택하는 자천권(自薦權)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여러 사람이 투표하여 후보자를 정하는 회천권(回薦權)을 가지기도 하였다. 사관(史官)을 뽑는 한림회천권(翰林回薦權)이 그 예다.
전랑은 특히 대간(臺諫)을 추천하는 권한이 있었다. 따라서 대간의 언론은 전랑의 지휘를 받아야만 하였다. 재상들이 잘못할 경우 전랑은 대간을 시켜 이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재상 가운데 이조․병조의 판서․참판․참의는 전랑의 직속상관이라, 전랑은 이들의 지휘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삼각관계가 당시의 정치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게 한 틀이었다. 상호 예속의 미묘한 관계를 유지시킨 것이다.
대간들은 또한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의 대표격인 감주(監主)의 지휘를 받았다. 감주는 3사의 대표로서 전랑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전랑은 조광조와 같은 주론자(主論者)의 지휘를 받아야 하였다. 주론자는 뒤에 산림(山林)으로 바뀌었다. 아무런 벼슬이 없어도 산림은 사림의 여론을 지휘하는 고려시대 국사(國師)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사림정치의 틀이 유지되는 한 정치는 이론적으로 건강하게 운영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림 사이에 동인․서인․남인․북인의 붕당이 생기고 붕당 간에 치열한 당쟁이 일어나자, 전랑이나 산림이 특정한 붕당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정권을 차지하려면 우선 전랑이나 감주, 산림에 자기 당 사람을 심었다. 동․서 분당이 전랑 자리를 둘러싸고 생긴 것이나, 집권당이 산림을 독차지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이상적인 사림정치의 틀에서 보면 부작용이었다. 부작용이기는 하였지만 이는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다. 권력은 독점하려는 특성이 있고, 이 때문에 권력투쟁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이다. 권력을 독점한 붕당은 반드시 분열하였다.
그렇다고 인조의 서인정권처럼 자기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남인을 관제야당으로 만들었다가 숙종조에 치열한 당쟁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권력의 독점을 둘러싼 당쟁은 파노라마처럼 계속되게 마련이다. 붕당간의 조정을 위해 탕평책을 써 보았으나 이것도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결국 정국은 노론 외척 일당독재의 세도정치로 치닫고 말았다.
- 2010/11/03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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