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하나 들어 보자.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돋보이는 등장인물 중 하나가 비담이다. 비담은 문노를 만나 강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무사로 성장했다. 그렇지만 어렸을 적에 버림받고 떠돌던 경험 때문에 사람을 대하는 데에도 거침이 없다. 그래서 진골귀족들에게도 말을 놓는다. 심지어 진골귀족 중에서도 보통 진골이 아니라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를 두들겨 패기까지 한다.
요즘 사람들의 눈에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로 비칠 수 있다. 그래서 드라마 속 등장인물인 비담의 인기도 웬만한 주연급에 꿀리지 않는다. 하지만 신라 때에는 이런 인물이 살아남을 수가 없다.
당시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신라는 경직되어 있기로 유명했던 골품제를 유지하고 있던 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근본도 모르는 -나중에 미실의 아들로 드러난다고 설정되어 있지만, 김춘추를 두들겨 패는 장면에서 확인된 일은 아니다- 천한 자가 왕손을 때렸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정신이 나간 자가 아닌 한, 진골귀족인 화랑들에게 말을 놓으며 기분 나는 대로 대할 생각을 하지도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물며 감히 왕손을 때리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다.
신라에 대하여 기본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점이 상식 수준의 사실이다. 그렇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 속 비담의 행각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랬으니 드라마 속에서는 얻어맞은 김춘추가 그 후에도 비담을 무서워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올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신라를 비롯한 전근대 시대도 지금과 별로 다를 것이 없이 ‘민주화된 사회’ 쯤으로 여기기 쉽다. 비담 뿐 아니라 장보고나 이순신 같은 역사적 위인들이, 드라마 속에서는 신분제를 없애려 노력했던 선구자의 면모를 보인 경우가 많다.
거의 근대사상가 급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수준이다. 비담의 경우, 만약 드라마에 나온 대로 행동을 했다면 사상가 급이 아니라 거의 혁명가 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근대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들이 그렇게 많았다면 왜 한국사회의 근대화가 그다지도 늦었을까?
그러니 이런 신분제가 깨어져 나아가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그런 제도를 없애는 근대화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알 리가 없다. 하물며 지금 대한민국 사회가 이루어 놓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피와 땀을 흘려서 이루어낸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지 모른다.
권력의 횡포에 당하지 않으면서 잘먹고 잘사는 사회가 아무 노력 없이 원래부터 이루어져 있었던 것처럼 인식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려 할 리가 없다. 요즘 우리 사회의 앞길에 중요한 영향을 줄 일들이 터져도 관심조차 갖지 않는 풍조가 생기는 현상이 이와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 2010/10/1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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