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힘의 균형과 임나일본부 5 └식민사학


도미노

고고학까지 팔아 4세기를 별 일 없었던 시기로 만들어 놓은 덕분에, 그 다음 세기까지도 백제의 영향력은 폭삭 주저앉았다. 5세기 광개토왕-장수왕으로 이어지는 전성기의 고구려에 당해서 실제로 영향력을 잃어버려 그렇겠지만, 재기에 성공한 5세기말-6세기까지도 백제를 별 볼일 없는 나라로 만든 점을 문제가 다르다. 그 도미노에 말려 들어간 사건이 이른바 ‘임나재건’이다.

일본서기에만 기록이 남아 있는 이 사건도 기록 자체만 보아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6세기 중엽, 일본 천황이 백제 성왕에게 ‘임나를 재건하라’고 지시했고, 성왕이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성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성과도 없던 사건 가지고 뭘 그렇게 집착하느냐고 할 지 모르지만, 당시에 성과가 없었다고 지금의 역사적 의미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에 관한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일본서기에서 나름대로 감추어 놓느라고 애썼던 백제의 영향력이 드러나는 것이다.

백제 성왕조차 일본 천황의 명령을 받아 임무를 수행했다는 기록을 가지고 거꾸로 백제의 영향력을 말하니,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임나일본부’가 관련되어 벌어지는 사태에서 기록이 조작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단서는 일본서기 자체에서 제공해준다. 일본서기에는 백제·가야·일본부가 ‘임나를 재건하라’는 천황의 명령을 받고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정상적인 외교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된다. 일본천황이 일본부에게 천황의 명령인 조칙(詔勅)을 ‘백제에 가서 들으라’고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내용은 이전에 냈던 책에서 잠깐 다룬 적이 있으나, 너무 간략하게 다루고 말아 버린 감이 있어 여기서 좀 더 자세히 보기로 한다.

정치와 외교적인 사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국제관계라는 것은 한 패거리가 되어 협조하는 나라끼리도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챙기겠다고 악다구니를 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우방(友邦)’이라며 등을 두드려주는 나라들끼리도 돌아서서는 자기 속셈 감추고 상대를 속이느라고 별 짓을 다 한다.

중요한 이권이 걸린 외교현안에 대한 자기 정부의 방침을 다른 나라가 알아채는 것은 이래서 위험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 속을 훤히 보여준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지 뻔하다. 이쪽 속셈을 훤히 알고 있는 상대가 그에 맞춘 대책을 세워 나올 테니까. 공연히 안 당해도 될 일까지 당할 수 있다.

지금도 외교문제에 대한 방침인 본국의 외교훈령이 기밀로 분류되는 건 이 때문이다. 자기네 외교관이 있는 나라의 정부가 이 훈령을 가로채기라도 할까봐, 지금도 훈령 등이 담긴 외교행랑은 관례적으로 다른 나라 정부가 건드릴 수 없는 특별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임나 재건 문제에 대한 천황의 생각과 일본부의 대처 방침에 대해 백제에 다 말해주고, 정작 자신의 직속기관인 일본부에게는 ‘백제에 가서 그 말을 전해 들어라’고 했다는 꼴이 된다. 지금식으로 말하자면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대사에게 ‘청와대에 가서 내 지시를 얻어 들으라’고 명령했다는 식이다. 천황을 비롯한 당시 일본의 집권층이 바보가 아닌 한, 실제로 이런 짓을 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런 기록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천황’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천황은 천자와 같은 개념으로, 천하의 꼭대기에서 명령을 내리는 존재라고 설정되어 있다. 실제로 그렇지 않았더라도 일본서기 같은 일본계 역사에서는 그렇게 쓰게 되어 있다. 그러니 주변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외교적 사건들도 모두 천황의 지시와 허락을 통해 이루어진 것처럼 서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도 사건의 전말을 통째로 바꿀 수는 없었다. 그 결과 말이 되지 않는 형태로 기록이 남게 된 셈이다. 뒤집어 보면, 바로 여기서 백제의 역할이 드러나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 이런 조작을 해야 체면이 유지될만큼 백제의 요구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나라였다는 뜻이 된다.

이런 사실을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고 싶을 리가 없다. 그래서 앞뒤가 맞지 않는 사실을 끌어안고 이후에 벌어졌던 역사도 끼어 맞추려 한다. 임나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본부의 행동이 무엇 때문에 이상하게 보이는지에 대해 일본 측에서 악착같이 해괴한 해석을 시도하는 속사정도 여기에 있다.

여기에서는 그 중에서 두 가지 정도만 다루어 보려 한다. 하나는 일본 천황이 ‘임나를 재건하라’고 명령했다는데, 천황의 직속기관인 일본부는 그 사업에 대해 깽판을 쳤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임나재건’을 신라에 귀순해버린 금과가야, 탁순 같은 나라들을 다시 독립시키자는 시도였다고 해석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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