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석받이 └ 잡글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이 말이 나오면 대개 희망찬 시작을 떠올린다. 그래서 이런 일을 두고서는 학생들이 희망을 가지도록 격려성 덕담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리 많지 않은 인생 경험 속에서도 그런 식의 덕담이 살아가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기 어렵지 않았다.

학생들 중에서도 며칠이 지난 지금, 그렇게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갈피조차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고민을 해가면서 대학생활을 시작해 나아가는 학생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매번 새 학기 수업이 시작되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느끼게 된다.

한때 대한민국의 대학은 독일의 유치원, 미국의 고등학교와 함께 놀면서 졸업할 수 있는 곳으로 꼽혀왔다. 지금 이런 말은 흘러간 옛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대학생들은 고등학교 시절 못지않게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 들린다. 그래서 대학사회도 많이 달라졌다는 자화자찬으로까지 연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그렇게 좋아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옛날에 비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다는 대한민국 대학 졸업생은, 세칭 일류대학이라 하더라도 반 이상이 졸업과 함께 실업자가 된다. 그만큼 일자리가 없어서? 그런데 왜 대한민국 사회에는 고급 인재가 수십만 단위로 부족할까? 현장에서 인력관리 하는 쪽에서 들려오는 말은 처참하다. ‘구인 공고를 내보면 수만 명씩 찾아오지만, 쓸 만한 놈은 하나도 없더라’, ‘대학에서 도대체 뭘 가르치는지 모르겠다. 7․80년대 공부 안하고 데모나 하다가 졸업했던 학생들이 차라리 낫다’

이런 말들이 100%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는 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7․80년대 졸업생들이 차라리 낫다는 말은 되씹어 볼 필요가 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학생들은 최소한의 고민은 하면서 살았다는 뜻이다.

요즘 학생들이 그렇게 된 원인은 ‘고생 모르고 자란 세대’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꼽는다. 부족한 것이 많던 시절에는 그 때문에라도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그러나 배고플 걱정보다 살찔 걱정을 더 많이 하는 지금 시대에는 고민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상황이 공부를 하는 데에도 바로 연결된다. 지금 대학생들 중 대부분이 부모님께 ‘너는 다른 것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살았을 것이다. 바로 그런 상황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버릇을 키우는 것 같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것은 다 어른들이 책임져주고 자신들은 시키는 공부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대한민국 사회는 고등학교 때까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문제는 그렇게 배어 있는 습관을 대학에 와서도 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르쳐 주는 거나 열심히 외우고 시험 쳐서 좋은 학점 따면 성공적인 대학생활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원칙 하나는 확인하고 가자. 대학은 시키는 거나 잘하는 단순 노동자를 길러내자고 세운 학교가 아니라는 점 말이다. 대학은 원래 ‘고급 인재’를 키우는 일을 해야 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고급 인재는 사회가 직면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아무 생각 없이 가르쳐 준 거나 외우는 학생들에게 이런 능력이 생겨날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대학에서의 공부란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선생의 역할도 공부를 시켜주는 사람이 아니라, 알아서 공부하는 것을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주면서 도와주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뻔한 원칙이 현실에서 먹히지 않는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을 응석받이로 키우는 풍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사례를 멀리 가서 찾을 필요도 없다. 당장 내 손으로 키우는 아이부터 그 모양이니까. 아들 녀석 하나를 두고 애 엄마와 ‘6년째 투쟁 중’인 사안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니라 ‘아침에 아이를 깨워서 학교 보내지 말자’는 문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아침에도 집안에서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엄마는 일어나지 않는 아들에게 험한 소리를 퍼붓고, 버티던 아들은 눈뜨고 나서 늦게 깨워주었다고 투정이다. 애 엄마의 행동을 좋게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때문이라고 변명한다. 하지만 6년째 그 행각을 지켜보아온 필자는 안다.

엄마만 없으면 아들 녀석은 깨워주지 않아도 제 시간에 학교에 간다. 애 엄마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수백 번도 더 얘기해 주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씩이나 쓸데없는 행동을 되풀이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아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마보이 만드는 재미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장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아이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배려하라고 우기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는 말해주고 싶다. 자기 아들을 마마보이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일수록 마마보이가 된 남의 아들 꼴은 못 본다는 점이다. 아이를 응석받이로 만든 사람은 그 아이들이 세상에서 험한 꼴을 당할 때 아무것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응석받이 꼴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아들 녀석만 하더라도 그렇다. 엄마만 없으면 제대로 일어나게 된 것도, 한번 지각해서 망신을 당해본 다음 일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한 가정의 문제일 뿐,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그렇게 키우지 않는다고 할 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사례는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자고 꺼낸 것이 아니다. 억지로 아이를 깨워서 학교 보내는 거나, 학생들 책상 앞에 앉혀놓고 밤늦게까지 도서관 불만 밝히면 교육 잘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발상이 뭐가 다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대학에서의 교육까지도 구조적으로 응석받이 양산하는 것 같다.

세상에는 강의실에서의 잔소리로만 가르쳐 줄 수 없는 일이 훨씬 많다. 대학에서는 선생이나 쳐다보면서 필요한 것을 모두 가르쳐주기 바라는 학생이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많은 일을 겪고 스스로 깨달아야 진정한 인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원래 대학 교육은 학생들에게 단편적인 정보나 구겨 넣어주는 것보다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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