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03/07 08:42
- dk7117.egloos.com/2523772
- 덧글수 : 6
- 2015/03/06 09:13
- dk7117.egloos.com/2523618
- 덧글수 : 8
- 2015/03/05 08:21
- dk7117.egloos.com/2523397
- 덧글수 : 2
- 2015/02/17 08:10
- dk7117.egloos.com/2521031
- 덧글수 : 6
며칠 전, TV 뉴스를 통해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매를 맞다가, 이를 뿌리치는 과정에서 남편을 가격해 상해를 입혔다는 소식을 보게 되었다. 이 자체는 평범한 부부싸움에 불과하겠지만, 이런 일이 보도된 이유는 이 사건에 대한 재판부의 판결 때문이다. 보도된 바로는 담당 판사가 ‘남편이 머리채를 잡았으나, 일단 이를 뿌리쳤으니 위협에서 벗어난 것임에도 반격을 가했기 때문에 정당방위가 아니다’라는 취지로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변호인 측에서 ‘머리채 잡은 것만 뿌리쳤으면 위협에서 벗어난 거냐, 얼마든지 추가로 폭행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던 모양이다.
이 재판이 어떤 결말을 낼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이 사건에서 보여진 재판부의 발상은 씁쓸함을 넘어 섬뜩함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 이상한 일일까? 요즘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힘이 있는 강자의 이른바 ‘갑질’이다. 물리적 힘·경제력·권력 등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는 힘을 이용해서 약자를 괴롭히는 짓을 이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최근 유명해진 이른바 ‘땅콩회항’을 비롯해서 많은 ‘갑질’이 지탄받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비슷한 사태가 일어나는 꼴을 보면 뿌리가 깊은 현상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지탄받는 행각의 뿌리가 뽑히지 않는 것을 보면, 이번 사건에서 보여진 재판부의 태도 같은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되는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약자의 저항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약자 중에서도 심하게 당하는 경우를 보면, 대개는 피해를 보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뒤집어 말하면, ‘10대를 맞더라도 1대라도 때려 보겠다고’ 대응하는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다. 필자 역시 비슷한 꼴을 당해보았기 때문에 경험으로 그 점을 느낄 수 있는 입장이다. 그렇게 보면 부당한 피해를 보는 약자의 대응도 쉽게 보인다.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 반발하면 된다는 해답이 나오니까.
그러나 웬만한 지능만 있으면 이런 게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점은 알 것이다. 심하게 핍박을 받다 보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반발을 해보기 마련이다. 그러니 반발하는 것만으로 해답이 된다면, 우리사회에 갑질이 이렇게까지 문제가 될 리가 없다. 즉 약자의 반발을 아무 소용없는 짓으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약자를 의미하는 ‘을’들이 정말 절망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
약자의 반발이 효과를 보려면, 사회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불가피하게 상대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어렵게 두려움을 이겨내고 반발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반발이 스스로 해결하는 것은 금지하는 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받는다면? 약자의 입장에서는 공권력의 보호는 받지 못면서, 자신의 반발만 응징당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 2015/02/16 09:22
- dk7117.egloos.com/2520900
- 덧글수 : 0
류성룡의 字는 而見, 號는 西厓, 또는 雲巖, 本貫은 豊山이다. 그는 1542년(중종 37) 10월 1일에 외가인 義城縣 沙村里에서 아버지 仲郢과 어머니 安東金氏(進士 光粹女)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애를 임신할 때 한 노인이 공중에서 내려와 “부인은 마땅히 귀한 아들을 낳을 거다”라고 했다고 한다.
서애의 고향은 安東府 豐山縣으로 그의 선대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풍산류씨의 선대 세계를 소개하면 [표 1]과 같다.
[표 1] 柳成龍의 先代 世系圖
一世 伯(恩賜及第) + 平山申氏(及第 益女)
二世 蘭玉(都染署令) + 奉化鄭氏(良醞令同正 洪成女)
三世 葆(檢校禮賓卿) + 巨濟潘氏(郎將 允精女)
四世 從惠(工曹典書) + 醴泉金氏(及第 元吉女)
安東權氏(軍器少監 桂女)
五世 洪(忠毅校尉 左軍司正) + 善山金氏(進士 琯女)
昌寧曺氏(興 尉衛保勝 保女)
六世 沼(忠義衛 副護軍, 贈司僕寺正) + 安東權 氏(平昌郡事 雍女)
七世 子溫(進士, 贈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 + 安東金氏(大司諫 係行女)
八世 公綽(文科, 杆城郡守, 贈戶曹叅判) +延安李氏(甲山敎授, 亨禮女)
九世 仲郢(黃海道觀察使, 贈領議政) + 安東金氏(進士 光粹女)
十世 成龍(文科, 領議政, 文忠公) + 全州李 氏(縣監 坰女)
永慕閣 소장『豊山柳氏族譜』(草本) 표지 이면에 초록되어 있는 호적단간에 의하면 류씨는 본래 풍산현의 戶長層이었다.『西厓先生世系之圖』에 의하면 一世 伯은 현직 호장의 아들로서 1290년(충열왕 16)에 恩賜科에 합격해 士族化의 길을 걸었다. 伯의 아들 蘭玉은 徵士郞 都染署令, 손자 葆는 檢校禮賓郞을 역임했다.
최근 덧글